•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1. 문화정치의 실상
  • 3) 친일세력의 양성
  • (3) 친일단체의 조직

(3) 친일단체의 조직

 조선총독부에서는 시정일반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을 선별하여 또는 조선인 단체를 선별하여 지원금을 대여하고 그들을 육성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동화·친일정책은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 직후≪京城日報≫에서 발간한≪朝鮮騷擾の眞相≫에서는 “조선인의 광범위한 저항은 총독정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무지와 이를 알리기 위해서는 온건한 인물을 키워 새로운 정치의 이해를 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127)加藤房藏,≪朝鮮騷擾の眞相≫(京城日報社, 1920), 100∼101쪽.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개인의 효용성과 단체의 효용성을 두고 후자가 좀더 조직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일진회와 같은 각종 친일단체를 설치하였다. 친일단체란 식민지 한국에서 조선총독부 및 일본정부의 사주·지원으로 조직된 어용적·반민족적 결사를 말한다. 총독부가 친일단체의 조직에 관심을 보인 것은 사이토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부터이다.

당국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만으로는 흑백을 가리기 어렵고 또한 흑백이 선명하게 가려지지 못한 결과로 압박정치라는 따위의 비난이 높아가는 것은 본의가 아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반 인민의 거취를 분명히 밝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믿을 수 있는 민간 유지를 시켜 은밀히 조선인 가운데 우리와(일본)와 같은 이상과 정신을 지니고 신명을 걸고 일을 해줄 핵심인물을 골라낸다. 다시 이 인물로 하여금 귀족·양반·유생·갑부·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게 각 계층과 사정에 따른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하게 하고 이에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충분히 활동하게 한다(朝鮮總督府,<朝鮮民族運動に對する對策>,≪齋藤實文書≫4).

 이러한 친일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은 조선인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 폭넓은 지지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128)친일단체에 대해서는 姜東鎭, 앞의 책, 220∼264쪽. 즉 식민지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조직적으로 동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친일단체는 매우 유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단체는 국내의 國民協會·矯風會·大東同志會·大正親睦會·維民會·小作人相助會·大東斯文會·商務社·相愛會·甲子俱樂部·同友會 등이며, 국외 특히 만주에서는 保民會·朝鮮人民會 등이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친일행위를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는 국민협회이다.

 국민협회는 1919년 8월 1일 閔元植이 세운 協成俱樂部를 개칭하여 친일단체로 전환한 것이다. 1920년 1월 경무국 사무관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의 지원으로 조직되었다. 회장 민원식은 일본 수상 하라의 내지연장주의에 기대어 조선의 자치청원운동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친일여론을 조성하였다. 특히 민원식은 참정권 청원운동에 진력하면서 일본의 자금혜택으로 친일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가장 먼저 처단할 인사로 민원식을 지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행위는 친일의 전형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129)姜東鎭, 위의 책, 221쪽. 이른바 신일본주의를 주창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나아가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130)≪新韓民報≫, 1920년 7월 22일,<소위 신일본주의파의 망동>. 하지만 국민협회도 민원식이 梁槿煥에게 암살당한 이후 그 활동은 급격하게 퇴조하였다.131)민원식이 양근환에게 피살된 사건은 일부 일본 지도자의 동정을 받았으며, 同和에 종사하는 친일파의 중대한 위협이라고 강조하였다(≪帝國議會衆議院議事速記錄≫4, 153쪽). 당시 국민협의의 대표적인 구성원은 金明濬·鄭丙朝·金甲淳·韓永源·李炳學·金錫永·申錫雨·朴鳳柱 등이었으며, 후일 有志聯盟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평양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大東同志會를 들 수 있다. 평안남도 지방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과 저항운동이 강한 지역이므로 일제로서는 이 지역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전 통감부 간도파출소 핵심인사였던 평남지사 시노타 지사쿠(篠田治策)의 지원 아래 선우순과 羅一鳳·金興健 등에게 대동동지회를 조직케 하였다.132)朝鮮總督府,≪朝鮮統治秘話≫, 143쪽.
姜東鎭, 앞의 책, 223쪽.
대동동지회의 친일행위는 주로 강연과 선전에 의존하였다. 즉 친일여론을 모으기 위하여 조선민중이 최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일본 통치에 달려있다고 하는 조선총독부의 新政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133)≪新韓民報≫, 1921년 6월 23일,<양적의 백두활동>. 하지만 평양에 본부를 두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지방에까지 세력을 넓히는 일은 어려웠다.

 한편 일제는 대지주 및 기업가를 포섭하고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維民會를 설치하였다. 또한 지역 유생들을 친일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동사문회·儒道振興會를 설치하였다. 유도진흥회는 1920년 1월 16일 서울 및 지방 유림 88명이 서울에 모여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양주·남양·장단 등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회가 설치되었으며, 각 도지사 역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유도진흥회의 설립목적은 “유도를 진흥해서 피폐된 유풍을 되살리고 동양도덕의 진원을 발휘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와 부합되는 것으로 金榮漢 등을 중추원의 참의로 우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친일유생을 이용하여 각 지역의 민중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134)姜東鎭, 앞의 책, 227∼230쪽.

 또한 일제는 보부상 단체인 商務社를 이용하여 식민지인에 대한 민간 감시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 근대사에서 보부상 집단은 주로 어용적·반민족적·전근대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에 사이토 총독은 보부상을 상무사로 바꾸어 대민감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당시 인물로는 李寅榮·金光熙·李址鎔·구연수 등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매우 격렬하였으며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성장하면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이 대항책으로서 탄압과 회유를 목적으로 위축된 친일파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직된 각파유지연맹은 1924년 1월 발기인대회를 통해 4월 11일 경성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135)발기인대회 참석한 인물은 金明濬·李炳烈·姜麟祐·南相一·金丸·李東雨·이희간·고희준·박병철·김동진·나홍석·이철호·이동혁·채기두·이풍재·유병룡·문택·박해원·유문환·유병필·김중환·정홍진·예종석·천영기·신석린·김상우·박춘금 등이다(姜東鎭, 위의 책, 248∼249쪽). 즉 국민회의·조선소작인상조회·유민회·동광회·노동회·조선경제회·교풍회·노동상애회·대정친목회·동민회·유도진흥회·청림교 등 12단체가 연합하여 친일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연맹은 일본과 조선의 융합에 힘쓰며 한일합병의 대원칙하에 두 민족이 영원한 행복, 발전을 위해 일치단결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과격사상의 배격, 총독정치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과 이를 통한 식민지인의 저항이 광범위하게 전개될 것을 우려한 일제에 의해 조직된 허수아비 단체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허울좋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매몰되어 자기 민족을 가혹한 식민통치의 수탈구조에 고착시켰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친일단체를 통하여 조선민중에게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침투시켜 식민지 지배에 협력시키려고 하였다. 이 부르주아 상층부는 식민지 지배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어 독립시기상조론 및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저항운동은 펼칠 수 없었다.136)朴慶植, 앞의 책, 210쪽.

<尹海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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