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1.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 2)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
  •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3)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이 공포된 뒤 강대현에 이어 이춘숙·홍도·이봉수 등이 상해에 도착해 4월 21일에 개원된 제2회 임시의정원에 합류했다.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이들은 한성정부를 구축할 필요를 느꼈다. 회의 마지막 날인 4월 23일에 임시의정원은 “內地에 있는 국민대회에 대하여 임시의정원이 성립되었음을 발포하자고 하는 이춘숙의 동의를 조완구의 제청으로 가결”했다.231)<大韓民國臨時議政院記事錄第2回集>(≪朝鮮民族運動史≫1, 未定稿), 154∼159쪽.

 4월 23일은 서울에서 국민대회가 개최된 날이었고, 한남수를 제외하고 이를 주도한 인물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232)한남수는 이규갑의 使者로 4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 16일에 상해에 도착하여 현순을 만났으나 이때는 이미 상해임시정부가 선포된 뒤였다(<한남수예심종결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40쪽). 이규갑·홍면희·장붕 등 국민대회 지도부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4월말 경이었다. 이들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서울에서 한성정부가 조직되었음을 전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은 상해 임시정부 지지를 확인하고 이들의 발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33)Soon Hyun, 앞의 책, 83쪽.

 임시의정원은 제4회 회기 중(1919. 4. 30∼5. 12)인 5월 3일 한성정부 문제에 대하여 회의를 열고 “4월 23일 경성에서 정한<임시정부조직 선포문>및 각원의 선정을 인정하지 않고,<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대한민국임시헌장선포문>·<대한민국임시헌장>·<선서문>·<정강>등 임시정부 성립에 관한 인쇄물을 국내에 송부하기 위해 연락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34)<上海에 있어서의 韓國獨立運動>(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25∼31쪽.

 그러나 주요 각료들이 취임을 유보함으로써 상해 임시정부는 정체상태에 빠졌다. 특히 국무총리 이승만(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과 군무총장 이동휘(신한민국정부의 집정관)의 취임거부는 임시정부의 출범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인 이승만은 이미 미국 워싱턴에 ‘大韓共和國 臨時事務所’라는 한성정부의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었다.235)≪新韓民報≫, 1919년 7월 19일.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정부 양쪽에서 정부수반에 선임되었으면서도 후자가 국민대회라는 절차를 밟아 성립되었다는 ‘명분’과, 상해 임시정부가 정부수반의 선출권과 탄핵권을 임시의정원에 부여하고 행정권을 국무총리가 중심이 되는 국무원에 일임함으로써 자신의 독주를 제도적으로 차단했음에 비해 한성정부는<約法>을 통해 독립된 국가로서 정식 국회가 개원될 때까지 정부수반의 절대권력을 보장해 준 ‘실익’ 때문에236)孫世一,<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臨時憲法 改定過程을 中心으로->(≪三·一運動50周年紀念論集≫, 동아일보사, 1969), 916∼917쪽.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직을 수임했다.

 이동휘도 사정은 비슷했다.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의 성립이 내외에 공포되고 노령과 간도일대에 이같은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그는 신한민국정부의 ‘집정관’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일제관헌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4월말 경 노령으로부터 훈춘현 塔道溝에 들어와 대한국민의회 훈춘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4월 24일부터 3일간에 걸쳐 회의를 열고 국내 침투를 결의했다.237)姜德相 編,≪現代史資料≫26:三·一運動編二, 154∼155쪽.

 상해 임시정부가 표류하고 있을 때 1919년 5월 외무차장 현순의 안내로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 운영의 정상화가 시도되었다. 시급한 문제는 선임된 각료들을 속히 상해에 집결시키는 일이었다.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휘를 취임시키는 일이 사태 해결의 첩경이라고 판단했다. 취임을 요구받은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바꿀 것”, “애국금을 폐지하고 오직 공채만을 발행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238)Soon Hyun, op.cit., pp.84∼85. 후자에 대해 안창호는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으나, 전자의 요구에 대해서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직함도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회신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는 한성정부를 수용할 뜻을 밝힌 것이다.

 한성정부의 수용방침은 이동휘를 상해로 불러오는 데에도 유리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지만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다음 가는 ‘국무총리총재’였기 때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협상도 한성정부의 활동에 유리한 명분을 제공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된 뒤 대한국민의회는 원세훈을 파견하여 대한국민의회와 임시의정원을 병합하고 정부의 위치를 노령으로 하자고 제의했었다.239)반병률,<大韓國民議會와 上海臨時政府의 統合政府 수립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2, 1988), 98쪽.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회의를 열어 상해 임시정부를 ‘假承認’하기로 하고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뒤 임시정부를 노령으로 이전한 다음 행동을 일치할 것을 결의했다.240)위와 같음. 대한국민의회는 상설의회 의장 원세훈을 상해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에 이 같은 결정을 전달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소재지를 노령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대한국민의회 쪽 제안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임시의정원은 국민의회의 제안을 심의하기 위한 1919년 5월 13일 제4회 회의에서 장병준·손두환·한위건·장도정·임봉래·홍도 등 6인의 연서로<의회 통일에 관한 건>을 제출했다.

 한위건은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국회가 있을 수 없으므로 시급히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손두환은 대한국민의회를 속히 임시의정원에 통일시키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대한국민의회에 대해 “임시정부로 하여금 3일 이내로 派員 조사한 후 그 사건을 의정원에 제출케 할 것”을 결의했다.241)<大韓民國臨時議政院記事錄第4回集>(≪朝鮮民族運動史≫1, 未定稿), 49∼50쪽.

 그러나 이러한 결의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통합문제는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임시의정원 쪽이 대한국민의회가 소비에트제를 채용, 의회기능뿐만 아니라 행정·사법의 기능까지도 통일적으로 공유한 조직242)<大韓民國臨時議政院記事錄第5回集>(≪朝鮮民族運動史≫1, 未定稿), 53∼54쪽.임에도 불구하고 의회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요컨대 임시의정원은 국민의회와의 통합을 ‘양 의회의 합병론’으로 여겼던 것이다.243)손세일, 앞의 글, 914쪽. 이 경우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가 의회 대 의회로 통합해도 상해 임시정부는 그대로 존속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 점은 1919년 6월 7일 상해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7월 14일에 통과된 제의안을 보아도 분명하다.244)<大韓民國臨時議政院記事錄第2回集>(≪朝鮮民族運動史≫1, 未定稿), 53∼54쪽.

 대한국민의회는 이 결의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협상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한성정부 봉대론’이 급속하게 대두했다. 한성정부 쪽의 이규갑은 홍면희와 함께 5월 25일 안창호의 상해 도착으로 국민의회와의 통합운동이 본격화되자 협상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245)송남헌,≪시베리아의 투사, 원세훈≫(천산산맥, 1990), 34쪽.
이규갑, 앞의 글, 186쪽.
당시 상해의 ‘노령대표’(국민의회)들도 한성정부를 지지했다(이정규,≪又觀文存≫, 삼화인쇄 출판부, 1974, 102쪽).

 그 결과 한성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국민의회 사이의 협상이 교착된 상황에서 양자를 아우르고 이를 통합하는 구심으로 떠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정부 개조안에 합의했다.

①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작소하고, 오직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② 정부의 위치는 아직 상해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③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작소한 후에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상해에서 수립 이래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효를 인정할 것이다.

④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 할 것이니, 독립선언 이후에 각지를 원만히 대표하여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리기 위함이다.

⑤ 현재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선택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246)김원용,≪재미한인오십년사≫(김호, 1956), 458쪽.

 1919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를 비롯한 한성정부 각원 명의로<약법 6조>까지 첨부, “海港(상해)에서 국민대리총회를 大開하고 국민의 요구와 사업상을 위해 京城에서 조직된 정부를 채용하기로 의결”하는 내용의<國務院諭告文>을 발표함으로써247)<大韓民國臨時政府國務院諭告>(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二), 743∼744쪽. 고정휴는 몇 가지 내용상의 미비점을 들어 ‘국무원유고문’의 실체를 의심하고 있다(高珽烋,<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정부 수립운동에 대한 재검토>,≪한국근현대사연구≫13, 2000, 43∼44쪽). 통합을 공식 선언했다.

 이에 따라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상설의회 총회를 열고 상해 임시정부 쪽 파견원도 참석한 가운데 해산을 선언했다. 임시의정원도 1919년 8월 18일 제6회 회의를 열어<임시정부 개조 및 임시헌법 개정에 관한 제안>을 통과시켰다.248)그러나 임시의정원에서 통과된 개조안은 ‘승인·개조분쟁’으로 국민의회의 거부에 직면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이해한 통일안은 임시정부만을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각원대로 개조함을 뜻하는 것이지, 임시의정원의 해산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국민의회 쪽이 이해한 통일안은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의 동시해산→한성정부 승인→신국회의 구성이었다. 그러므로 국민의회의 입장에서 임시의정원이 해산은커녕 임시헌법 개정과 임시정부의 개조를 단행한 것은 ‘불법’이었다. 1920년 2월 15일 국민의회는 상해임정의 ‘약속위반’을 비난하며 재건을 선언했다(반병률, 앞의 글(1988) 참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