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1) 국민대표회의 소집론과 ‘정부옹호파’의 반대운동
  •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2) 정부옹호파의 국민대표회 반대운동

 1921년 2월 초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제기된 이후 정식 회의가 열리기까지 상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 소집을 지지하는 상해의 개조파 및 북경의 창조파와, 이를 반대·저지시키려는 정부옹호파가 크게 대립했다. 일반적으로 국민대표회를 반대하고 임정 고수를 주장한 이들을 임정유지파로 일컬어 왔고 이들은 주로 이승만을 중심한 기호파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개조파 역시 기본적으로 임정 유지를 주장한 점에서 이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어 여기서는 임정유지파를 당시의 용어인 ‘정부옹호파’로 대신하였다. 예컨대 국민대표회에 대한 찬반논란이 한참 일던 무렵≪독립신문≫에 투고된 한 글에서는 “今日에 至하야 므슨 理由로 所謂 政府擁護論이란 別問題갓치 니러나 누구누구난 政府擁護派라는 名詞가 隱然” 중 생겼다고 하면서, 이들은 “政府 아래 俯首服從하는 者”라고 했다.298)≪독립신문≫, 1921년 12월 6일.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정부옹호파는 이를 ‘政府敗潰運動’으로 파악하고 크게 반발했다.

 1921년 2월 초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론이 점차 확산되어가자 趙琬九·윤기섭 등 45명의 정부옹호파는 3월 5일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할 것, 현대통령 이하 각 국무원을 신임할 것, 언론·행동 등 일체의 현시국을 파괴하는 행위를 방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반포하고, 3월 12일 상해 거류민단 사무소에서 현 정부를 후원할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윤기섭·조완구·김구 등 20명을 조직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들은 국민대표회 소집세력에 대응하는 정부옹호파의 외곽 단체로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절대로 옹호할 것”, “광복의 정신과 協進主義를 鼓勵할 것”, “국세의 납입을 勵行할 것”, “군사의 복습을 督進할 것” 등 4개항의 강령을 채택했다.299)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142∼143쪽.

 이 무렵 상해에 머물고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5월 17·18일 임시의정원과 국무원에 외교상 긴급한 일과 재정의 절박함을 이유로 미국에 건너간다는 사실을 통고하고 법무총장 申圭植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한 뒤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는 임시대통령 명의의<諭告>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 소집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신규식 내각이 할 일을 밝혔다.

 <유고>에서 이승만은 국민대표회 소집 명분 가운데 하나로 제기되어 상해 정국의 최대 현안이 된 자신의 거취 문제, 즉 대통령직 퇴진 문제에 대해 이것은 완전한 민의기관에서 공식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大局을 흔들려는 도의에 어긋난 소수인의 행위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신규식 내각에 대해서는 비상한 결속과 결심으로 임정의 기초를 더욱 굳건히 하고 정무의 중대 안건과 국무원 진퇴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동의를 받아 결정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다소의 불평자나 음모자들의 선동을 잘못 듣고 대국을 顚覆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다.300)中央日報社·延世大學校韓國學硏究所,≪梨花莊所藏雩南李承晩文書≫東文編 六(國學資料院, 1998), 46∼63쪽(이하≪李承晩文書≫). 이처럼 이승만은<유고>를 통해 국민대표회를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나 임정이 존폐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임정 유지를 내각에 당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의 행위는 임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기보다는 당시 위임통치 청원문제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그로 인한 임정 분열의 수습을 방기하고 도피한 성격이 짙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저지시키기 위해 상해의 정부옹호파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국민대표회 소집론자들이 자신의 거취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제기한 위임통치 청원문제를 해명하는 데 노력했다. 자신의 상해 비선조직의 일원인 장붕은 1921년 6월 18일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상해나 북경 등지의 청년은 물론 중국인이나 서양인 사이에 “1910년에 한국 주권자가 통치를 일본에 넘겨준 것과 이승만이 한국통치권을 미국에 요구하기를 청원한 것은 다 같은 의미요, 같은 해석에 속한다”거나 이승만은 “이완용과 같다”는 등 위임통치 청원문제와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이 있음을 전했다. 그리고 鄭漢景으로 하여금 위임통치의 定意와 청원한 이유, 청원한 이후의 결과 및 영향, 사건에 관계된 인물 등을 세상에 공포하게 하여 오해가 없도록 하라고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301)≪李承晩文書≫18, 118∼120쪽.

 장붕의 편지를 받은 이승만은 1921년 7월 16일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과 장붕에게 위임통치 청원문제에 대한 경위를 설명한 정한경의 편지를 보내어 공포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와 관련한 소문이 국내에 퍼질 것을 더욱 우려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특별히 당부하기도 했다.302)≪李承晩文書≫16, 59∼60·229∼236쪽.

 위임통치 청원문제의 한 주역인 정한경은 1921년 3월 26일과 6월 12일 두 차례 안창호와 이광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는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3·1운동 이전의 일이고 당시 안창호가 회장으로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승인을 받아 제출한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때도 없이 시비거리로 삼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하며 은근히 안창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승만은 이와 함께 미주·간도 및 국내의 지지 세력을 총동원하여 국민대표회를 고립·무산시키려는 계획도 진행했다. 이것은 그가 신규식 및 국내의 李商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1921년 7월 16일 신규식에게 편지를 보내어 미주에서는 정부옹호책으로 동지회를 조직하여 정부를 파괴하려는 자와 아주 분립하여 奮勵制禦하기를 결심하였으니, 원동에서도 이러한 단체들과 연락하고 특히 북로군정서의 隱溪(白純) 선생과 상의하여 군정서의 이름으로 정부를 옹호한다는 주지를 성명케 하도록 지시했다.303)≪李承晩文書≫16, 56∼57쪽. 1922년 4월 22일 同志會에서 하와이 各島各地方 代表에게 보낸 통지서에서 “우리가 우리 임시대통령의 권고심을 듯고 동지회를 조직이 무삼 연고인뇨. 우리가 하나님 랍헤셔 맹셔고 이 회를 조직은 우리의 거 독립럽을 위야 우리 동지가 림시정부를 밧들 우리 二千萬의 두령되시 대통령을 압헤셔우고 을 갓치 면셔 조국을 긔어히 광복코져 이라”(≪李承晩文書≫12, 231∼232쪽) 한 데서 동지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21년 7월 29일 이상재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신규식·손정도·김인전·윤기섭·이희경·조완구·신익희·이동녕·이시영 등은 정부에 충성을 다하는 자인 반면에 박용만·이동휘·남형우·신숙·김규식·안창호·여운형 등 국민대표회 소집론자는 정부파괴를 선전하는 자이며 재정만 있으면 이런 소수인들의 파괴운동이 무효로 돌아갈 뿐이라고 하면서, 지금 국무원은 결속이 잘되어 전과 같이 분열하던 폐가 없으니 정부의 현상유지 경비로 1년에 3만원을 담당해 줄 것을 부탁했다.304)≪李承晩文書≫16, 180∼185쪽.

 이승만은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잘 결정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라고 하며 이상재에게 경비 20만원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고 임정에게도 모든 역량을 태평양회의에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 즉 그는 태평양회의에 대비하여 정부에서 속히 할 일로써 국내와 원동 각지에서 재정을 확보하여 구미위원부로 보내고, 국내와 원동 각지에 시위운동을 신속히 착수하여 민심을 정부로 통합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국민대표회 소집론을 정부를 파괴하려는 소수 불평분자들의 소행으로 왜곡하고 자신이 그 동안 비선조직을 통해 상해와 국내외 각지에 구축해 놓은 지지세력을 동원하여 국민대표회를 무산시키려고 했다. 나아가 그는 태평양회의를 구실로 정치적 위기를 일시적으로 회피하는 한편 태평양회의에서 기대되는 성과를 바탕으로 임시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간 뒤 임정의 절대옹호의 책임을 맡게 된 신규식 내각은, 1921년 11월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될 태평양회의는 우리 국가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장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며 태평양회의 준비에 진력했다. 이때부터 다시 한번 국내외가 미국에 기대를 걸고 온 역량을 태평양회의에 집중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 개최문제는 일시 잠복되었다. 그러나 1922년 2월 태평양회의는 이승만이나 정부옹호파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태평양회의는 결국 그 동안 국민대표회 소집을 반대하며 온 역량을 외교 활동에 집중했던 신규식 내각에게 외교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신규식 국무총리 대리가 사직한 데 이어 군무총장 노백린 한 사람을 제외한 이동녕·이시영·손정도 등 모든 각원이 사직함으로써 1922년 3월 이후 임정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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