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2.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 3) 국민대표회의에서의 쟁점
  •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1)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

 1923년 3월 국민대표회의에서 시국문제가 쟁점이 되었을 때≪독립신문≫에서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동기와 회의요건의 대부분이 먼저 시국문제를 잘 해결함에 있다고 하고 만일 그 源頭를 명백히 아니하면 기타의 모든 良計妙策을 아무리 정하여 놓는다 하더라도 다시 空算에 돌아갈 것이라며 시국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했다.325)≪독립신문≫, 1923년 3월 7일. 국민대표회의의 성공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시국문제란, 임정의 잘못된 점이 있으면 개조하자는 개조론과 과거의 내외 각지의 대소 단체기관은 다 없애고 신기관을 조직하자는 창조론의 입장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이에 따라 시국문제의 핵심은 그 동안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역할을 해 온 임정의 존폐문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었고, 정부옹호파가 국민대표회를 극구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당시부터 개최여부를 두고 쟁점이 되었던 시국문제는 국민대표회의의 적법·부적법 문제였다. 1921년 2월 초 박은식 등이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장했을 때 이를 반대한 정부옹호파의 입장은 13도를 대표하는 의정원이 있는데 또 국민대표회를 소집하는 것은 불법이며 임시의정원이 곧 국민대표회이기 때문에 다른 대표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326)≪독립신문≫, 1922년 7월 8일. 즉 정부옹호파는 헌법상 최고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있는데도 같은 성격의 국민대표회를 소집한다는 것은 법리상 불법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정부옹호파의 입장에 대해 국민대표회 지지파인 개조·창조 양파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먼저 국민대표회가 불법이라는 법리적 주장에 대해, 의원을 선출하는 각 구역의 선거회는 그 의원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있고 의정원 전체에 대하여는 선거회가 연합하여 합치한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연합체의 선거회가 의정원과 대등되는 중첩 기관이라 할 수 없듯이 국민대표회를 일종의 연합선거회로 가상해도 이치에 부당함이 없고 법리상으로도 국민대표회와 의정원이 중복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327)≪독립신문≫, 1921년 5월 25일.

 국민대표회가 위헌이라는 정부옹호파의 주장에 대해서도 “대한의 독립운동도 대한이란 것을 위함이고 결코 임시헌법이나 제정코져 함이” 아니며 “일보를 更進하여 적극적으로 말하면 대한의 임시헌법은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대한의 인민이 제정한 것이오 결코 대한의 임시헌법이나 제정키 위한 독립운동은 아니”라고 하면서 정부옹호파에 대해 “독립의 진의를 몰각한” “헌법에 중독된 자”라고 비판했다.328)≪독립신문≫, 1922년 7월 1일. 한 마디로 독립이 우리의 지상 목표이지 임시헌법 그 자체가 신성불가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국민대표회의가 성질상 임시의정원과 같은 기관이라는 정부옹호파의 주장에 대해서도 “국민대표회의의 성질은 국민 전체에 관한 제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모이는 일시적 회합이고”, “어느 일정한 목적하에 계속적으로 존립한 단체가 아니라”, “자유의사로 집합한 회의”이기 때문에 “대표회의를 단순한 국가입법권행사의 기관으로 인정하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했다.329)≪독립신문≫, 1921년 8월 1일. 즉 기관이란 성질에서 볼 때도 임시의정원은 헌법기관인데 반해 국민대표회는 일시적 회합이기 때문에 양자는 성질상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 적법·부적법 문제에 관한 논쟁은 형식논리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 이면에는 임시의정원의 대표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었다. 사실 임시의정원의 의원 선출 방식 및 의원들의 자질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임정 안팎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예컨대 100여 명의 인민이 모여야만 할 道會에서 십수 명의 偏黨으로 모여 그 중에서도 5, 6표로 의원이 선출되고 혹 이도 못하여 해당 道의 인사가 상해에 자기 1명뿐이면 적재여부는 물론하고 무조건으로 의원이라 擅稱한다며 임시의정원 의원의 대표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의정원 의원과 국민대표회 대표를 비교하여 10명이 모여 5, 6표로 피선된 것이 원만한 대표인지 아니면 적어도 한 단체에서 100명 이상 또는 한 지방 인민의 公選이나 혹은 국내의 몇몇 인물이 모여 지정한 대표 중 어느 것이 원만한 대표인가라고 하며 반문했던 것이다.330)≪독립신문≫, 1922년 10월 21일.

 국민대표회 지지파들은 임시의정원은 법리를 떠나 사실과 실제에 있어서 임시의정원 및 의원의 대표성을 비판·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에 대한 이 같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정작 임시의정원의 존립 그 자체에 대해서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입장이 크게 달랐다. 임시의정원에 대한 개조파의 비판은 국민대표회와 임시의정원이 모순되지 않고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애초부터 임시의정원을 불신임한 창조파의 입장과는 크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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