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1) 임시정부 중심의 대당결성 주장

 임시정부측의 유일당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추진은 1926년 5월 안창호 계열에 의해 펼쳐지기 시작했다. 5월에 상해에서 趙尙燮·吳永善 등이 조직한 獨立運動促成會(촉진회)에 의해 펼쳐지기 시작했다.346)朝鮮總督府 警務局,≪高等警察關係年表≫(朝鮮總督府, 1930), 201쪽. 이 같은 움직임은 안창호와 관련된 것인데, 하나는 1년 10개월의 미국체류를 마치고 다시 상해로 돌아오는데 때맞춘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하나는 임시정부가 5월 8일에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기도 한 것 같다. 1년 10개월만에 돌아오는 그를 기다리며 그 터를 다지는 작업을 벌인 것이며, 또한 안창호가 미국으로 가기 전부터 남북만주를 오르내리며 벌이던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이라는 활동 성향과 안창호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상섭·오영선·崔昌植·李裕弼 등의 발기 아래 조직된 이 단체의 회장에 安恭根이 선출되었다. 이 회는 “과거에 있어서의 운동의 실태를 시정하고 장래의 완벽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국 민족해방을 촉성하기 위해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기성하려고 노력한다”는 강령하에 선언서를 발표했다.347)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598쪽. 이러한 노력이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한 직후부터 펼치는 민족운동세력에 대한 통일운동의 바탕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쉽게 헤아릴 수 있겠다. 그러나 5월 26일에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국무령직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오직 재야에서 자유롭게 통일운동에 나서기를 원했다.

 임시정부측의 대당결성 움직임은 7월에 들어 다시 거론되면서 이전과 달리 공식화되었다. 1926년 7월 8일이 임시정부로서는 중요한 날이었다. 상해와 남경 사이의 조그만 도시 鎭江에 머물던 洪震이 상해로 와서 국무령으로 취임한 날이며, 안창호가 대동단결과 ‘대혁명당’조직을 천명하고 나선 날이다. 이승만 면직 이후, 박은식이 대통령직을 이었다가 순국하였고, 남만주의 대표자 이상룡이 국무령이 되었다가 반년만에 물러난 뒤를 다시 홍진이 이었다. 임시의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신임 국무령 홍진은 정부차원의 시정방침으로<3대 강령>을 제시하면서 대동 단결된 정당체 조직을 천명하고 나섰다.

① 비타협적 자주독립의 신운동을 촉진할 것.

② 전민족을 망라하여 공고한 黨體를 조직할 것.

③ 전세계피압박민족과 연맹하여 협동전선을 조직하는 동시에 또 연락이 가능한 우방과 제휴할 것(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15쪽).

 홍진은 이상과 같은 강령을 통해 뚜렷한 두 가지 명제인 ‘비타협적 운동’의 전개와 ‘대당결성’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움직임은 독립운동계에 영향을 미쳐, 비타협적 운동과 대당결성의 추진을 가져오게 하였다.

 같은 날, 7월 8일 저녁 宋秉祚·金鍾商·徐大宇·韓鎭敎·金甫淵·許雲·黃勳 등의 발기로 연설회가 상해 三一堂에서 열렸다. 그 연설문이 10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주간으로 발행되던≪新韓民報≫995호부터 998호까지 4회로 나누어 게재되었는데,<대혁명당을 조직하자 림시졍부를 유지>라는 것이었다. 이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안창호는 대혁명당을 조직·완성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유지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자기가 말하는 민족혁명에 대해 “이민족의 압박적 현상을 파괴하고 본 민족의 자유적 현상을 건설하자는 철저한 각오하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정치적 혁명이나 경제혁명이나 종교혁명과 같은 부분적 성질에 있지 않고 우리 민족으로는 누구나 다 같이 어떤 혁명분자나 다 같이 힘쓸 결심을 하여야 할 것이외다”라고 밝혔다.348)≪新韓民報≫, 1926년 10월 4∼28일,<대혁명당을 조직하자 림시졍부를 유지>(≪한국근현대사연구≫8, 1998), 226쪽(현재의 맞춤법에 맞게 고침). 그러면서 그는 혁명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우리의 혁명사업이 성공되도록 하는 데는 제1은 대혁명당을 조직하여야 하겠고, 제2로는 대혁명당이 조직되기까지 임시정부를 어떻게든지 붙들어 가야 할 것이외다. 대혁명당이 조직되는 동시에 임시정부보다 더 큰 어떤 조직체가 생기면 그 때에는 그만 둔다할지라도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는 자체의 내부로서 드러내놓고 임시정부를 집어치운다하면 우리의 운동은 부흥시켜 질 여지가 없이 되겠습니다. 그런즉, 임시정부를 붙들어 가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마땅히 할 책임으로 알고 일치 협력하여 대조직체가 실현되기까지 유지하여 가도록 하기를 바랍니다(≪新韓民報≫, 1926년 10월 4∼28일,<대혁명당을 조직하자 림시졍부를 유지>;≪한국근현대사연구≫8, 1998, 231∼232쪽).

 이처럼 안창호는 혁명 즉,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一大革命黨을 결성해야 하며 민족협동전선의 결성방법으로 중국국민당과 같이 대당을 조직하여 ‘以黨治國’의 형태를 취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이어서 임시정부의 생명을 영구히 유지해야 하며 정부를 충실하게 하기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 주장은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으로 결집된 힘을 임시정부의 옹호에 쏟아 부으려는 유지파들의 자세를 대변해 주었다. 그렇다면 일대혁명당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유일당·민족유일당·유일독립당 등으로 일컬어졌는데, “以黨工作으로써 독립혁명운동을 완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349)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56), 146쪽. 이것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투쟁하는 혁명자들이 하나의 기치 아래 모이고 하나의 호령 아래 모여야만 비로소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판단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350)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10∼111쪽. 유일당을 결성코자 했던 독립운동자들은 이당치국의 우수성이 이미 소련의 공산당·중국국민당·아일랜드의 신펜당 등에서 입증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안창호와 홍진의 활동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촉성회 결성을 위해 활동을 본격적으로 선도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비록 쇠약해지기는 했으나 임시정부 중심의 민족주의 세력이 당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전선통일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국내 신간회운동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으며, 국내외의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351)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유일당운동이 무르익던 무렵인 1927년에 초에 만주로 대표를 파견하여 협동전선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러한 점은 2월 25일에 滿洲 撫松縣 板項子에서 임시정부 대표 9명이 고려공산당 대표 3명, 北滿學生團 대표 6명 및 기타 단체 대표 4명 등과 함께 회합을 갖고,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당분간 일치행동을 취하여 ○○의 ○○을 촉진할 것” 등 4개 조항을 결의했던 사실에서 확인된다(國史編纂委員會,≪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8, 탐구당, 1973, 407쪽. 빈칸의 내용은 ‘戰線統一’이거나 ‘大黨結成’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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