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3) 임시정부 개헌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결성

 북경촉성회의 결성 영향은 상해에 그대로 파급되었다. 북경촉성회 성립 직후 11월에 국내에서<正友會宣言>이 나왔고, 그 골자인 방향전환론이 전해지면서 유일당 결성을 위한 움직임은 더욱 촉진되었다.359)1926년 11월 15일에 국내의 正友會가 발표한 선언에 대하여 상해의 ‘社會主義者同盟’(주의자동맹인 듯-필자)은 이에 찬성키로 했다(國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323쪽). 임시정부는 여기에 대처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체제 개편이 필요했다. 국무령 취임식에서 ‘전민족을 망라하여 공고한 당체 조직’을 내걸었던 홍진은 그 자리를 사직하고 재야에서 유일당 발기를 위해 움직였다. 이를 이어 1926년 12월 13일에 국무령에 취임한 金九는 대혁명당 조직을 내다보면서 政體變更을 위한 개헌에 착수했다. 이미 안창호의 연설이 대혁명당 결성까지 임시정부를 유지하자고 했으니, 이를 뒤집어 보면 대혁명당이 결성되면 임시정부를 해체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한 상황을 가늠하면서 이에 대응할 헌법을 마련하자는 것이 김구의 의도요, 임시정부 유지자들의 생각이었다.

 김구는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어<臨時約憲>의 개정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金甲·李圭洪 등이 기초한 개헌안이 1927년 2월 15일 임시의정원을 통과함으로써 3차 개헌이 달성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1927년 4월 11일자로 발표된 3차 개헌을 통해 ‘以黨治國’의 노선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헌법 제2조의 단서에 “단,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黨이 완성될 때는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360)韓詩俊 編,≪大韓民國臨時政府 法令集≫(국가보훈처, 1999), 56쪽. 라고 명시하고, 또한 제5장 보칙 제49조에서는 그 당이 완성될 때 헌법 개정도 거기에서 하도록 규정했다.361)韓詩俊 編, 위의 책, 61쪽. 즉 ‘이당치국’의 원리를 도입한 것이 그 핵심인데, 이것은 대혁명당, 유일당이 건설되면 최고 권력기관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조직 자체를 없앤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결국 임시정부 유지파들은 유일당으로 정부를 유지하자는 것에 합의하면서도 정부조직 자체는 유지해 나가자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로서는 혁명적인 자세 전환을 하고 나선 셈이다. 그러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청년들이 1927년 3월 26일 상해 三一堂에서 상해한인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청년의 鞏固한 단결과 분열된 전선의 통일을 기할 것과 독립운동의 유일당이 속히 완성되기를 노력한다”는 등의 강령을 채택했다.362)國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422쪽.

 한편, 상해지역의 좌파 세력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1927년 3월에 화요회계의 洪南杓와 ML계의 鄭栢이 대당결성의 준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좌파의 양대 세력이 결속한 가운데 상해촉성회 결성을 위한 모임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좌우세력을 대표하여 홍진·홍남표 두 사람의 이름으로 된<전민족적독립당결성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어서 3월 21일에 삼일당에서 창립총회가 거행되었다.363)창립일에 대해 3월 21일 설, 3월 31일 설, 4월 11일 설 등 세 가지가 있다. 모두 10일 정도씩 차이가 나는데, 확실하지 않아 일단 3월 21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 창립총회에 약 40명이 참석했으며,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유일당의 조직을 촉성할 것과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함에 노력할 것 등의 강령을 결의하고 조직을 마쳤다. 총회에서 선출된 집행위원은 다음과 같다.364)아래의 A, B 분류는 金喜坤·韓相禱·韓詩俊·兪炳勇,≪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한울, 1995, 25쪽.

ⓐ 洪震·李東寧·李圭洪·趙尙燮·趙琬九·羅昌憲·崔錫淳·崔昌植·金澈·金甲·吳永善·安泰(恭-필자)根·金九·尹琦燮·宋秉祚·金奎植

ⓑ 洪南杓·曺奉岩·黃勳·康景善·金枓奉·鄭栢·玄鼎健·李敏達(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 105쪽)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가 ⓐ의 16명이며, ⓑ의 8명이 사회주의 계열이다. 특히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국무위원 전원(김구·윤기섭·이규홍·김철·오영선·김갑)이 그 일원으로 포함된 사실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고, 임시정부가 유일당을 결성하여 이를 통해 정부를 운영해 나가려는 방침을 확고하게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록 좌우합작을 이루었지만,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둘러싼 유지파 세력이 사회주의 계열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주의자 8명 가운데, 洪南杓·曺奉岩·黃勳·姜景善·金枓奉 등 5명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이거나 화요회 계열이고, 정백과 玄鼎健은 상해파이면서 ML 계열이었다. 여기에서 좌파 가운데에는 화요회가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