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3. 임시정부와 유일당운동
  • 2) 유일당운동의 추진과 임시정부의 개헌
  •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4) 의열단의 선언과 광동·무한·남경촉성회 결성

 북경에 이어 상해에서 1927년 3월에 상해촉성회가 성립되자, 5월에는 의열단이<독립당촉성운동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상해촉성회가 성립된 직후에 발표된 것으로 結黨의 원칙을 확인하면서 방법 문제까지 제기했고, 광동촉성회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선언은 먼저 “全運動線의 시대적 상황이 과거의 착오를 깨닫고 새롭고 완전한 진로를 도모하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하고서, 그것이 곧 “독립운동의 통일 및 통일적 당조직운동, 대독립당촉성운동”이라고 했다.365)李鉉淙,≪近代民族意識의 脈絡≫(아세아문화사, 1979), 245쪽.

 <의열단선언>은 이어서 종래의 착오와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통일된 당조직의 방법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366)의열단이 이 선언에서 제기했던 조직 방법 문제는 결국 1929년 말에 가서 좌파세력에 의해 해체의 명분으로 사용되었다(촉성회의 해체 부분에서 후술함). 특히 만주에서는 조직 방법의 차이로 결렬되었는데, 하나의 주장은 기존단체를 부정하고 唯一黨을 수립하고자 했고, 또 하나는 기존단체를 인정하고 그 단체를 중심으로 협동전선을 건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전자는 개인본위조직론으로 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를 만들었고, 후자는 단체중심조직론으로 全民族唯一黨協議會를 결성함으로써 만주의 독립운동계는 양분되었다(丁原鈺,<在滿抗日 獨立運動 團體의 全民族唯一黨運動>,≪白山學報≫19, 1975, 197∼198쪽).

통일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되지 않고 여하한 방법으로가 문제이다. 從하여 통일적 당을 조직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고 조직 방법이 문제이다. 과연 여하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통일하고 독립당을 조직할 것인가는 一般戰員의 고심하는 문제였다(李鉉淙,≪近代民族意識의 脈絡≫, 아세아문화사, 1979, 245쪽).

 또 이 선언은 독립당촉성운동에 대하여 세 가지의 상황를 지적했다. 그 내용은 “첫째, 일본의 학살과 세계피압박민족해방전쟁 등의 객관적 조건이 독립당촉성운동을 강하게 촉진하고 있다. 둘째, 과거 수차의 통일적인 모임이 분열된 것에서 오는 주관적 경험이 자신을 강하게 하였다. 셋째, 현대 과학적 이론과 혁명의 방략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고, 이 신청년이 출마하여 全運動을 지배하게 되었다”367)李鉉淙, 앞의 책, 247쪽.라고 하는 등이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주변 정세와 독립운동자의 경험이 독립당촉성운동을 가능케 하리라고 했다. 특히 세번째 항의 주장은 좌파의 청년운동을 고무시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의열단은 촉성회의 형식으로 통일적 중추기관, 즉 대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했다. 또 전체 단원이 개인자격으로 가입하여 대당결성 즉시 단을 해체한다고 하여 개인본위의 방법을 지지했다. 이로서 의열단은 대당결성의 방법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만주와는 달리 상해 독립운동계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거론되지 못한 듯하다.368)이러한 사실은 1929년 10월에 발표된<상해촉성회 해체선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난 3년간을 통하여 밟아 온 독립조직운동을 회고하면 그 어느 방법론계를 불문하고 속히 여하한 강령으로 독립당을 조직하여 보자고 하는 표시가 없었던 일, 일각도 휴식할 수 없는 혁명선에서 오로지 독립당을 조직한다는 것뿐이며 독립당을 조직하기까지 어떠한 투쟁을 하자는 것을 설명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空漠한 생각이며 전혀 대중과 격리된 운동에 불과하다”(國會圖書館,≪韓國獨立運動史料(中國篇)≫, 635쪽). 특히 이 현상은 국내의 신간회에 대하여 ML계열이 시기에 따라 ‘민족단일당론’, ‘대중적 협동전선론’, ‘반제협동전선론’ 등으로 전술을 전환시켜 나간 것에 비교해 보면,369)李賢周,<新幹會에 참여한 社會主義者들의 運動論-ML黨系를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4, 1989), 75∼116쪽.
국내의 사회주의 세력이 추구하던 조직형태는 신간회 출범 무렵의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에서 1927년 11월 이전에 ‘민족협동전선당의 매개형태’로 바뀌었고, 또 제6회 코민테른대회(1928. 7∼9)가<식민지·반식민지 제국에 있어서의 혁명운동에 대한 테제>를 통해 신간회의 당적 조직형태를 부정하고 ‘협의체적 공동전선’을 요구하게 되자, ‘민족협동전선의 매개형태’로 바뀌었다(李均永,≪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1993, 266∼267·284∼285쪽).
상해에서 국내의 통일전선전술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던 인물에 韓偉健이 있었다. 4차 조선공산당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중반에 상해로 망명한 그가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직전까지 李鐵岳이란 필명으로≪계급투쟁≫을 발간하여 국외에서 국내 ML계열을 지도하고 있었다(水野直樹,<韓偉健>,≪朝鮮民族運動史硏究≫1, 1984, 204∼206쪽;<韓偉健>(追補),≪朝鮮民族運動史硏究≫3, 1986, 242∼244쪽). 이론적 지도자였던 그가 망명 이후에 중국관내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분명하다.
중국관내에서의 그것은 각지 촉성회의 결성 이후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국내의 ‘민족단일당론’에 해당하는 ‘유일독립당론’을 줄곧 고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370)그러나 1929년 5월에 한위건은 ML당 계열의 운동론으로 ‘대중적 협동전선론’을 제시했다(李鐵岳,<朝鮮革命의 特質과 勞動階級 전위의 當面任務>,≪계급투쟁≫창간호, 1929, 14쪽). 이 논리는 곧 ML파가 유일당운동을 중단시키는 것인데, 이 운동론은 1929년 11월에 발표된<상해촉성회 해체선언>에서 다시 재론되었다.

 <의열단선언>이 발표되던 5월 8일, 광동촉성회가 조직되었다. 의열단의 주도로 열린 대독립당조직광동촉성회는 金星淑이 상해에서 북경촉성회의 집행위원인 張健相과 면회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5월 8일에 김성숙은 鄭學彬과 함께 170여 명의 회원을 규합하고서 대독립당조직광동촉성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광동에 집결해 있던 의열단의 중심인물들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5월에<독립당촉성운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선언은 “광동촉성회 결성 추진 및 마지막 단계에서 촉성회 및 촉성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작성,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371)김영범,<1920년대 후반기의 민족유일당운동에 대한 재검토>(≪한국근현대사연구≫1, 1994), 113쪽.

 한국유일독립당무한촉성회도 같은 해에 의열단원인 朴建雄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372)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앞의 책, 108쪽. 늦어도 7월 10일 이전, 아마도 7월 초 무렵에 조직된 것으로 추정되며, 회원이 150명에 달하였다.373)김영범, 앞의 글(1994), 113쪽. 그리고 남경촉성회는 가장 늦은 1927년 9월 27일에 金一柱를 중심으로 창립회원 30명이 모인 가운데 조직되었다.374)金正明,≪朝鮮獨立運動≫2, 329쪽.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앞의 책, 106쪽.
앞의 해 10월에 북경촉성회가 결성된 지 1년이 채 못되어 중국관내지역 5개 중심도시에서 지역별 결성을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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