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 2) 청산리대첩
  •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2)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만주에 불법 투입된 일본군의 ‘작전’ 목적은 독립군의 완전 제거, 곧 “불령선인단에 대해 섬멸적 타격”을 입하는 데 있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군의 간도 침공에 앞서 일제측의 강요로 독립군에 대한 탄압을 외형적으로나마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던 처지에 놓인 중국 관헌은 현상 타개를 위해 대한국민회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단에 대해 근거지 이동을 요구하게 되었다.460)愼鏞廈,≪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乙酉文化社, 1985), 401∼405쪽. 연길·왕청·화룡·훈춘 등 북간도의 4개 현에서 활동중이던 여러 독립군단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1920년 8월 하순부터 장정길에 올랐다.

 북간도 독립군단 가운데 가장 먼저 장정에 오른 부대는 홍범도가 인솔하는 대한독립군이었다. 대한독립군은 봉오동승첩 이후 연길현 明月溝로 근거지를 옮긴 뒤 8월 하순 사관학교까지 건립한 본영을 떠나 백두산 서남방을 향해 장정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한달만인 9월 20일 경 대한독립군은 안도현과 접경지인 화룡현 二道溝 漁郞村 부근에 도착하였다.

 대한독립군에 이어 안무의 대한국민군도 8월 31일 근거지인 왕청현 依蘭溝를 떠나 안도현 방면을 향해 장정에 오른 뒤 9월말 경 역시 화룡현 이도구 지방에 도착하였다.461)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351쪽.

 한편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군무도독부를 이끌던 최진동은 군사통일과 새로운 기지설정 등의 문제에서 홍범도·안무 등과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결국 군무도독부는 백두산을 향하지 않고 동북방으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해 9월말 경 왕청현 羅子溝에 도착하였다. 또한 의군부·신민단·광복단·의민단 등의 여러 독립군단도 9월 경 대한독립군이 향한 안도현 방면의 서남방으로 이동하거나 혹은 동북방의 나자구로 이동하였다.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 가운데 가장 늦게 장정길에 오른 부대는 왕청현 西大坡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대한군정서였다. 대한군정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건립한 사관 양성학교인 사관연성소에서 1920년 9월 9일 성대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298명의 사관생도들이 6개월간의 훈련과정을 이날 이수하였던 것이다.462)≪獨立新聞≫, 1921년 2월 25일,<大韓軍政署報告>. 또 이에 앞서 전력증강을 위해 1920년 6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파견하였던 200명 가량의 구입무기 운반대가 8월말 경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장정이 늦어진 대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졸업생도를 중심으로 하는 旅行隊(敎成隊)와 사령부 경비대, 그리고 본대 등으로 부대를 편성하고 9월 17∼18일 장정에 올랐다. 총기와 탄약 등의 무기를 우마차에 적재하고 서대파의 본영을 떠나 화룡현 삼도구의 청산리를 향해 450리의 험로를 진군한 끝에 거의 한달만인 10월 12∼13일 경 목적지인 삼도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서대파에서 청산리까지의 행군로에 대해 대한국민회 간부였던 洪相杓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대파에서 야음을 이용하여 대황구를 지나서 왕청현 街北으로 수천리 떨어진 험산준령을 거쳐 연길현 의란구 깊은 산 비적들이 통행하는 산로밖에 없었다. 이 산로는 안도현·연길현·왕청현을 연결하여 나재구(나자구)를 거쳐 노령으로 통행하는 지대였다. 그래서 이 산로는 마적이 이용하였고 만주국 당시 김일성군 약 300명과 최현군 약 15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우리 동포의 거주가 희소하므로 무장독립군의 장거리 행군에 고생이 막심하였던 것이다. 서대파에서 노두구령까지 산로이므로 약 320리 가량 될 것이다. 영에서 10리 되는 서구파 앞으로 내려가서 30리 가면 군정서 구역인 장인강 부락에 도착하여 30리 더 가면 이도구에 도착한다. 이도구에서 어랑촌이 10리요, 백운평까지 75리가 된다. 그러므로 서대파에서 백운평까지는 455리 가량 되는 것이다(洪相杓,≪간도독립운동비화≫, 선경도서출판사, 1990, 85∼86쪽).

 이상에서 보았듯이, 청산리대첩의 주역인 김좌진 사령관이 인솔한 대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인솔한 대한독립군·대한국민군 등의 연합부대는 192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 새로운 항일근거지를 건설하고자 각기 본영을 떠나 4∼5백리를 장정한 후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방의 밀림지대로 진군하였던 것이다.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독립군단이 이와 같이 서남방 백두산록의 험준한 밀림지대인 화룡현 이도구·삼도구 방면으로 장정한 것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 때문이었으며, 그 구체적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먼저 이도구·삼도구 일대가 국경과 근접해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 침략세력 구축이 궁극적 활동목표였던 독립군으로서는 국내진입작전을 펼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국경 근접지대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활동상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명장 홍범도가 백두산 방면으로 장정을 시작하면서

지금부터 1∼2개월 이내에 반드시 일본군대의 출동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들은 일본군대와 교전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당지방에서 전사한다면 개죽음과 같아서 일시 백두산지방에 回避, 結氷 때를 기다려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땅에 驀進하여 의의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姜德相 編,≪現代史資料≫28, 350∼351쪽).

라고 근거지 이동의 동기와 이유에 대해 밝힌 대목도 독립군의 그러한 경향성을 생생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백두산록 일대가 일본군과의 대전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세가 험준하고 산림이 울창한 이곳은 일본군의 정면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형지세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효과적인 대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구비한 곳이었다. 독립군이 청산리 일대에서 거두게 되는 대승첩이 바로 이 점을 입증시켜 주는 산 증좌가 된다.

 끝으로, 백두산록 일대는 당시 奉天省과 吉林省의 접경지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중국군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適地로 판단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독립군이 이곳에다 근거지를 구축하게 되면, 일제측의 강요를 받은 길림성 군대가 공격해 올 경우에 독립군이 봉천성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고, 봉천성 군대가 공격해 올 경우에도 길림성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463)愼鏞廈, 앞의 책, 410쪽.
尹炳奭, 앞의 책, 170∼171쪽.

 이도구와 삼도구 밀림지대 중에서도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첫 회전에서 대승을 거둔 청산리는 함북 무산 북쪽에 자리잡은 忠信場에서 시작되는 장장 60리의 깊은 협곡이다. 그 골짜기 안에는 大進昌·松里坪·平壤村·싸리밭 등의 여러 촌락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또한 청산리 북쪽에 위치한 이도구도 漁郞村을 비롯해 甲山村·泉水坪·蜂蜜溝 등의 여러 촌락이 산재한 심산장곡이다.464)≪獨立新聞≫, 1921년 3월 12일,<北路我軍實戰記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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