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3.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 3) 자유시사변

3) 자유시사변

 자유시사변은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1년 6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일어난 이 사변은 여러 가지 복잡한 구조 속에서 파생된 까닭에 사건의 전모와 성격을 일원적으로 규정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곧 자유시사변은 러시아 극동공화국 및 볼셰비키의 한국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간섭, 이로 인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갈등의 심화 등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 모순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한꺼번에 분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1922년말 공산화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시베리아 연해주지방의 정세는 대단히 복잡하고 혼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볼셰비키혁명세력인 적위군과 반동세력인 백위군의 혼전 속에 일본·미국·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의 무력간섭과 시베리아에 수용되어 있던 체코군대의 반란 등으로 인해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혼미한 정세를 보였던 것이다. 연해주 한인사회도 역시 현지의 복잡한 정세가 그대로 투영됨으로써 분열과 혼돈 속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사변의 단초가 되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상 두 개의 분파, 이른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파생하게 된 배경도 이와 같은 연해주의 복잡한 정세에 기인한다.

 자유시사변은 외형적으로 볼 때 연해주 내전기간에 파생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두 계파간의 대립과 갈등의 분출 양상으로 나타났다. 볼셰비키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 시베리아 연해주에서는 통상 민족좌익운동으로 불리는 방편적인 공산주의운동의 조직과, 처음부터 볼셰비키와 직결된 한인공산주의 조직이 출현하였다. 전자는 1918년 6월 하바로프스크에서 결성된 李東輝·金立·朴鎭淳 등의 한인사회당을 말하고, 후자는 1919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金哲勳·吳夏黙 등에 의해 결성된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를 말한다. 양파는 뒷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두 개의 고려공산당으로 대립하여 레닌정권에 경쟁적으로 접근하면서 한인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자유시사변은 바로 이 과정에서 빚어진 참극인 것이다.510)김창순,<자유시사변>(≪한민족독립운동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8), 142쪽. 자유시사변 기술에서는 이 글의 주지를 크게 수용하였다.

 한편 1918년 4월 일본군의 블라디보스톡 상륙 직후부터 볼셰비키쪽에 가담하였던 한인들은 일찍부터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여 저항에 나섰다. 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 6월말 100여 명의 한인부대가 결성된 것을 시발로 秋風(수이푼)·水淸(스찬)·포시에트 등지에서 한인무장부대가 결성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1920년 초부터 연해주의 볼셰비키세력과 한인세력은 연합전선의 형태를 띠면서 일본군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한러 연합부대가 1920년 3월에 아무르강 하구 태평양 연안의 항구인 니콜라예프스크(泥港) 주둔 일본군을 공격, 전멸시킨 니항사건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일본군은 1920년 4월에 들어와 볼셰비키와 한인세력에 대한 대대적 공세에 돌입하였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이때 일본군이 연해주 각지의 한인사회를 유린한 것을 4월참변이라 한다.

 한인무장부대들은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의 탄압이 이처럼 가중되고 상대적으로 북쪽의 흑룡주 일대에서 극동공화국과 볼셰비키세력이 강화·안정됨에 따라 점차 흑룡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 舊 알렉시에프스크)로 집결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블라디보스톡 공격으로 볼셰비키를 따라 일찍 흑룡주로 올라간 이만군대와 다반군대 등의 한인무장부대도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들 부대는 대개 200여 명 안팎으로, 이만군의 사령관은 김표토르, 다반군의 사령관은 최니콜라이였다.

 한인무장부대들이 이처럼 자유시로 집결하게 된 것은 당시 러시아 한인사회의 임시정부로 등장한 대한국민의회의 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무렵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 각지의 한인무장부대로 하여금 흑룡주의 자유시로 집결토록 지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흑룡주의 한인사회는 볼셰비키가 이 지역에서 대세를 장악하자 한국독립운동의 안전지대가 흑룡주에 마련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20년 3월 자유시에서 흑룡주한인총회가 발족된 것도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이다. 총회는 발족과 동시에 군대모집에 들어가 곧 400명의 1개 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 부대는 러시아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과 교섭한 결과 2군단 산하의 특립대대로 배치되어 한인보병자유대대로 불렸다. 총지휘관인 대대장에는 오하묵이, 그리고 정치문화 담당 총책인 군정위원장에는 최고려가 각각 임명되었다. 오하묵은 러시아 적군 제2군단 제6연대장겸 블라고베시첸스크 수비대장으로 있다가 한인보병자유대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자유시의 한인보병자유대대는 연해주의 다른 한인무장부대나 만주 독립군과는 달리 볼셰비키군대로서의 한인부대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이 자유시에 집결하는 한인무장세력 내에 심상찮은 갈등관계를 가져온 요인이었다.511)김창순, 위의 글, 148∼149쪽.

 자유시에 집결한 시베리아 연해주 한인무장세력 가운데 내부사정이 가장 복잡한 부대는 니항군대였다. 이 부대는 자유시 이동 이후 사할린의용대로 개칭되었다. 朴秉吉이 이끌던 380여 명의 니항군대는 1920년 3월 한러 연합군이 니콜라예프스크(니항)를 공격할 때 여기에 참전했던 한인부대였다. 니항사건 발발 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철수하면서 니항군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니항군대 본대는 극동공화국 제2군단 제19연대 산하의 제3대대로 편입되었다. 2군단의 제19연대는 한인 니항군대와 함께 니콜라예프스크 일본군 공격을 주도했던 빨치산 트라피친 부대가 이동해 온 뒤 편입된 연대였다. 한편 본대에 앞서 자유시를 향해 이동해온 니항군대의 다른 한 부대는 한인자유대대 산하에 들어와 1개 중대로 편입되었다. 니항군대 본대의 최고 지휘자였던 박병길은 제2인자 박일리야와의 알력으로 인해 부대를 이탈하여 자유시를 찾아와 자유대대의 비서장에 취임함으로써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니항군대는 두 파로 나뉘어 상호 심각한 갈등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 점 또한 사변을 야기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한편 앞에서 살폈듯이 청산리대첩 직후 북만주 밀산으로 집결했던 간도의 여러 독립군부대들은 통합군단인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뒤 1921년 1월 각 부대별로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가 이만(현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게 되었다. 이때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도 이범석과 함께 이만으로 넘어갔었지만 자유시로 북상하지 않고 만주로 되돌아와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극동공화국 적위군의 인도에 의해 만주에서 넘어온 독립군부대는 곧 흑룡주로 이동하였다. 흑룡주에 도착하였을 당시 주요 부대는 대한총군부(최진동, 허재욱)·대한국민군(안무)·대한군정서(서일)·대한독립군(홍범도) 등이었으며, 총병력 1,9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자유시에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부대는 이르쿠츠크에 있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였다. 이 부대원 600여 명은 5월 중 세 차례에 걸쳐 자유시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만주와 러시아 각지로부터 몰려와 자유시와 그 인근에 주둔하게 된 한인 병력은 4천여 명에 달하였다.512)尹炳奭 外,≪러시아지역의 韓人社會와 民族運動史≫(敎文社, 1994), 218쪽.

 한인 무력의 자유시 집결은 자유대대와 니항군대간에 정면대결을 야기시켰다. 자유대대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정부’로 자처하던 대한국민의회를 봉대했고, 니항군대는 상해 임시정부를 봉대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당시 오하묵·최고려 등의 이르쿠츠크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하여 시베리아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대표하고 있는 세력은 이동휘계의 朴愛·李鏞 등 상해파였다. 이 양자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을 자파 세력하에 두려고 자유대대와 니항군대간의 군권투쟁에 개입하게 된다.513)김창순, 앞의 글, 153쪽.

 1920년 10월 극동공화국 내의 볼셰비키 최고기관인 원동부에 박애·桂奉瑀·金震·張道政·朴昌殷 등 5인을 간부로 하는 ‘한인부’가 조직되었다. 12월 21일 열린 한인부 간부회의에서는 치타에서 한인의병대회를 소집해서 전한군사위원회를 결성할 것과 대회 소집에 이르기까지 잠정적으로 임시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모든 한인 군대를 통솔케 한다고 결정하였다. 1921년 1월 16일 한인부 회의에서 조직된 임시군사위원회 위원으로는 박창은·이용·한창걸·박일리야 등이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르쿠츠크파의 무력인 자유대대와 대립 불화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 원인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력을 자유대대가 관할하려는 것을 군사위원회가 자기네에게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한 데 있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군권 다툼은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력의 향배가 관건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니항군대 본대를 이끌고 자유시에 들어온 박일리야는 자유대대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치타의 극동공화국 한인부를 찾아가게 된다. 박애 등의 한인부는 자유대대측과 아무런 협의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한 뒤 한인부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리고 러시아인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임명하여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니항군대의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로 변경하면서 자유시에 집결한 전 한인 무력을 이 군대가 관할토록 하는 극동공화국 군부의 명령을 대동케 하였다. 그러나 자유대대측에서는 이 명령에 불복하였으며, 박창은은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였다. 이에 한인부에서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이들은 즉시 지휘권을 행사하여 자유대대에 편입된 종래의 니항군대와 다반군대를 자유시 북방의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만주 독립군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나아가 대대장 오하묵이 치타에 체재중이던 자유대대를 강압적 분위기하에서 자유시 인근의 크라스노야르로 이동케 하였다. 이러한 군대 이동 조치는 자유시에 군대를 그대로 두고서는 지휘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514)김창순, 위의 글, 156쪽.

 한편 1921년 3월 김하석과 최고려 등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출두하여 임시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하였다.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에는 러시아인 갈란다시윌리, 부사령관에는 오하묵, 그리고 군정위원에는 김하석·채성룡 등이 선임되었다. 한인무장세력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가진 것은 당시 보리스·스미야츠키를 수령으로 하는 이르쿠츠크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였던 까닭에, 이때부터 상황이 일변해 고려군정의회가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곧 극동공화국 내의 러시아공산당이 맡고 있던 러시아 한인문제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전담하게 되고, 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극동공화국 한인부의 위상은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임시고려군정의회는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종료된 직후인 5월에는 ‘임시’를 떼고 정식으로 고려군정의회가 되었다. 최고지도부는 총사령관 갈란다시윌리, 군정의원 유동열·최고려 3인으로 선정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마사노프에서는 상해파에 의해 한인의병대회가 개최되어 한인군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이는 1921년 1월 이용을 위원장으로 조직했던 임시한인군사위원회을 확대·강화시킨 것이었다. 이 대회에는 러시아의 니항군대·이만군대와, 만주의 대한광복군·대한군정서·대한의군부·군무도독부 독립군이 참가하였다. 이때 군사위원으로는 이용·채영·한운용·장기영·박일리야 등이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시에는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군정의회가, 그 인근의 마사노프에는 상해파의 한인군사위원회가 동시에 양립된 채 대치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런 대치상황에서 1921년 5월 하순 치타를 떠난 갈란다시윌리 일행은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니항군대와 다반군대, 그리고 이만군대 등의 러시아 한인무장 군대와 대한총군부·대한국민군 등의 만주 독립군은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고려군정의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이들 부대들이 마사노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던 데 비해, 자유대대와 홍범도 부대만이 자유시에 돌아와 주둔중이었다.

 자유시 도착 직후 갈란다시윌리는 자신이 전군의 총사령관임을 선언하고 사할린의용대 지휘자 박일리야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박일리야는 이를 거부한 채 오히려 총사령관이 마사노프로 와 주도록 요청하였다. 하지만 양군의 팽팽한 대치상황 속에서 형세는 고려군정의회측에 점점 유리하게 돌아갔다. 홍범도 부대 이탈 이후 안무의 대한국민군이 자유시로 돌아간 것을 비롯하여 이탈자가 속출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일리야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갈란다시윌리의 명령에 끝까지 복종하지 않았다.515)김창순, 위의 글, 157∼159쪽.

 이와 같은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6월 27일 밤 고려군정의회 지도부는 사할린의용대의 강제 무장해제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유시 수비대인 극동적군 제2군단 제12여단 29연대와 교섭한 결과 4개 중대를 차출하고, 여기에 오하묵과 최고려 등의 자유대대 병력이 가담하여 사할린의용대의 주둔지인 수라세프카로 출동시켰다. 이때 장갑차 등의 중화기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뒤 28일 오후 공격명령이 하달되자 사할린의용대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러시아군대의 공격 앞에 사할린의용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한인무장대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만주에서 온 독립군은 동포의 의연금으로 산 총을 버릴 수 없다고 하여 총을 든 채 제야강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이 세칭 자유시사변이다. 독립운동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변을 현장에서 목격한 김승빈이라는 인물은 그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자유시사변에 직접 참가자는 아니나 목격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1921년 6월 21일(28일의 착각)이라고 기억되는데, 그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고려혁명군사의회의 군대와 싸특의용군의 군대가 서로 대진하고 있는데 무장 충돌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가서 보니 혁명군사의회군대는 자유시 동남향 언덕진 비탈을 따라 산개하였는데 좌익에 갈란다시윌리 군대가 배치되었고 그에 이어서 조선인 부대들이 배치되어 산병선을 이루었고 싸특의용군 부대들은 수랍쓰까 서남방 동구로부터 혁명군의회 군대들의 산병선을 대치하여 산병선을 이루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친히 보았습니다. … 낮 12시가 거의 되어 또다시 전선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 시가를 벗어나자마자 한 방의 총소리가 나더니 그에 이어 양측에서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좀 더 나가니 보초가 통행을 금지하기 때문에 전선에까지 가지 못하고 도로 돌아왔습니다. 총소리는 해질 무렵에 가서야 그쳤습니다. 그러니 전투가 8∼9시간 계속된 셈입니다. 그(참변) 이튿날 싸특의용군에서 탈퇴하여 자유시에 와 있던 홍범도 군대와 하사양성소 두 부대에서 군인 80여 명을 동원하여 전장(참변현장) 소제를 하였습니다. 즉 전사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였습니다. … 그 후에 관도 갖추지 못하고 장례식도 없이 길게 파놓은 웅덩이에 시체를 차례로 눕히고 그 위에 백목을 덮고 묻었습니다. … 싸특의용군의 군인 수효가 2천여 명에 달했는데 그 중에서 33인이 전사하고 제야강을 건너다가 배가 엎어져서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이 약간 있었다고 하며 포로로 붙잡힌 사람이 800여 명이 되었고 그 밖에는 사처로 달아났습니다(≪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洪範圖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1995, 99∼100쪽).

 자유시사변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가해자인 고려군정의회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으로 집계한 반면, 간도 반일단체들이 연명한 참변 성토문에서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등 대략 55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그리고 917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516)尹炳奭,≪再發掘 韓國獨立運動史≫(한국일보사, 1987), 257쪽. 무릇 자유시사변의 피해상황은 독립운동사상 미증유의 참극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이상의 자유시사변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의 싸움이라는 한인 내분에 일차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여기에는 볼셰비키의 일관되지 못한 정책에도 큰 책임이 있다. 그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파 혹은 자유대대와 니항군대간에 대립이 엄존하고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자유대대측을 비호, 고려군정의회라는 최고기구를 구성하여 상해파와 니항군대의 불만을 샀다. 비록 한인부대가 러시아 상급기관의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한인부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결성되어 러시아혁명을 지원하는 외국인 부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일방적인 조처는 러시아공산당 혹은 코민테른이 말하는 피압박민족해방이라는 슬로건 내부에 짙은 자국 중심주의의 색채를 띠고 진행되었던 것이다.517)尹炳奭 外, 앞의 책, 232∼233쪽.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고 새로운 항일전의 전기를 마련코자 결행한 만주 독립군의 고난의 장정은 결국 이처럼 쓰라린 수난사로 귀결되고 말았다. 참변 이후 잔여 부대는 북만주로 다시 넘어왔으며, 일부는 현지에 잔류하고 나머지는 사산하게 되었다. 그 뒤 남북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통신과 연락을 재개하면서 군단 정비와 통합작업에 들어가 1920년대 중반 만주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갔다.

<朴敏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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