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3. 3·1운동 직후와 1920년대의 의열투쟁
  • 2) 1921년 이후의 의열투쟁 양상과 추이
  •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3)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의열단이 암살파괴운동의 대열에서 물러선 직후인 1926년 1월 초 상해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羅昌憲의 주도로 병인의용대가 창립되어 의열단식 대일투쟁의 맥을 이어갔다. 창립선언에서 “암살·파괴는 혁명가의 無上의 무기이며 유일한 수단이다. … 귀하가 과연 혁명가라면 폭탄을 안아라, 칼과 친하라”720)國會圖書館 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76쪽.고 언명했다시피, 병인의용대는 ‘철혈주의’를721)여기서 ‘철혈’은 ‘黑鐵赤血’의 줄임말이고, ‘흑철’이란 무기를 뜻한다. 표방하며 일제주구 숙청, 반동분자 엄단, 적의 중요시설 파괴 및 중요인물 격살 등을 가장 큰 임무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임시정부 보위-엄호단체의 성격도 강하였다. 60여 명의 대원 중에는 1920년대 초의 국내 폭탄거사에 참여했던 역전의 용사들도 여럿 있었으니, 김예진·임용일[林得山] 등이 그러했다.

 창립 직후인 2월 초부터 3월까지 朴濟乾·李秀鳳 등 병인의용대원은 일본총영사관의 밀정 5명을 연이어 척살하였다.722)趙凡來,<丙寅義勇隊 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7, 1993), 365쪽. 일찍이 1920년에 임시정부 경무국원들이 일본영사관 밀정 金道淳과 총독부 밀정 鄭弼和를,723)김구 著, 김학민·이병갑 註解,≪정본 백범일지≫(학민사, 1997), 274·277·278쪽. 구국모험단원 李錫이 총독부 밀정 金秉憲을724)姜德相 編,≪現代史資料≫27, 286쪽. 처단했던 것과 같은 식이었다. 이 일련의 응징거사에 같이 참여했던 崔炳善과 張英煥(張鎭元)이 피체 수감되자, 李德三(李永善)이 그들을 구출하고자 4월 16일에 일본영사관원 內堀의 辦事處인 勝田館을 습격해서 수류탄을 던져, 일경 여러 명을 폭살시켰다.72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53쪽.
趙素昻, 앞의 책, 158쪽.

 일본총영사관 건물 폭파공작도 1년 사이에 세 차례나 벌였다.72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835쪽.
國會圖書館 編,≪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606∼607쪽.
김용국 외, 앞의 책, 614쪽.
趙凡來, 앞의 글 363∼364쪽.
제1차 거사는 1926년 4월 8일에 金光善 등 대원 3인이 자동차를 타고가며 영사관 구내로 폭탄 2개를 던져 건물 벽과 유리창을 대파시킨 것이었다. 제2차 공작은 9월 5일에 인력거꾼을 시켜 시한폭탄을 영사관 안으로 들여보내려 한 것인데, 정문에서 지체하는 사이에 폭탄이 터져 영사관 폭파에는 실패하였다. 제3차 거사는727)거사 시점은 자료에 따라 1926년말과 1927년 두 가지로 나온다. 姜昌濟 등이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영사관 창고를 대파시킨 것이었다. 이에 앞서 1926년 6월에는 純宗 장례를 전후로 국내 폭탄거사도 계획하여 高俊澤·이덕삼 등 4인의 결사대가 중국 상선 편으로 상해를 출발했는데, 사전 기밀누설로 황포강 하류에서 일본 수상경찰에 전원 피체되었다.728)≪東亞日報≫, 1926년 6월 4·19일.
趙素昻, 앞의 책, 158쪽.
김용국 외, 앞의 책, 610∼612쪽.

 이처럼 발족 첫 해인 1926년에 맹렬한 활동상을 보인 병인의용대는 1927년 이후로는 상해지방 독립운동계 내부의 좌익세력 제압과 임시정부 보위에만 전념하여 의열투쟁의 실적을 거의 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당시의 중국지역 독립운동진영 안팎의 전반적 정세와 분위기 탓이 컸다. 중국의 국공분열 및 좌우대결의 여파가 한국독립운동 대오에도 밀어닥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독립운동계 내부의 관심과 역량은 한동안 민족유일당 또는 협동전선 문제를 둘러싼 조직정렬과 노선논쟁으로 집중되었으며, 임시정부의 재정상태가 극히 열악하여 조직적 의열투쟁에 대한 지원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27년 이후로 4, 5년 동안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의열투쟁의 열기가 앞 시기에 훨씬 못미치는 소강상태가 연출되었다. 몇 건의 개인 단독의거와 밀정 척살, 군자금 확보를 위한 금융기관 습격거사만이 간간히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다가 1931년에 ‘9·18사변’(만주사변)의 발발과 때를 맞춰 독립운동의 침체 국면을 타개하려는 조직적 의열투쟁이 재활성화하고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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