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 1930년대와 일제말의 의열투쟁
  •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6) 국내 의열투쟁의 불연속성과 지구성

 1927년 장진홍의 의거 이후로 국내에서는 의열투쟁의 사례가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1929년 4월에 비행학교 설립 기금 마련차 중국에서 귀국한 共明團752)지금까지는 ‘共鳴團’으로 표기되어 왔으나, 최양옥이 피체되었을 때 ‘울 鳴字’가 아니라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하므로 ‘共明團’으로 적는다. 단장 崔養玉 등 3인이 서울 망우리에서 경춘간 우편차를 습격해서 거액의 현금을 탈취한 후 잠적했으나 군경의 추격을 받고 피체된753)≪東亞日報≫, 1929년 4월 22일.
김용국 외,≪독립운동사≫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674∼676쪽.
사건과, 1935년 겨울에 서울의 양조장 종업원 曺安得이 친구 5명과 함께 폭탄을 만들어 총독 폭살을 두 번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기회를 엿보던 중 전원 피체된754)김용국 외,≪遺芳集≫(亞細亞文化史, 1992), 802∼803쪽. 사건을 꼽을 수 있을 따름이다.755)1929년 원산에서 金壽岳 등 세 소년이 爆彈起義하여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보이나(趙素昻,≪遺芳集≫, 亞細亞文化社, 1992, 81쪽), 자세한 내용이 없어서 불확실하다.

 이는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사회통제가 갈수록 강화되는데다 국내 운동조직들은 노동자·농민 중심의 대중투쟁 진작을 위한 지하활동에만 주력했지 의열거사의 운동방식에는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일전쟁 발발 이후로는 주민생활과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파쇼적 탄압이 극악해져서, 국내 민중이나 지식인층 모두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열투쟁의 준비나 기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국외 독립운동진영도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조직적 무장대오의 확립과 군사력의 확충을 통하여 독립전쟁 준비에 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 간 반면, 종래의 의열투쟁 노선은 방기되었다.

 이리하여 의열투쟁의 맥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의열투쟁의 시도나 기운까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의열투쟁은 오히려 예기치 못한 시점에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1943년 초여름 국내의 일제 요인과 친일파 처단, 관공서 및 형무소 습격, 군사시설 및 군수산업체 파괴 등을 활동목표로 삼은 비밀결사 朝鮮民族解放協同黨이 일본 동경에서 결성되었다. 유학생 金鍾柏 등이 중심이 된 이 조직은 1944년 봄에 국내로 본거를 옮겨 경성에 비밀 아지트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 유격전 거점을 구축하고, 300여 명의 무장행동대를 훈련시킴과 동시에 고관과 친일파의 명단·주소를 파악하고 폭발물을 구입하는 등 봉기와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비밀 누설로 그 해 11월에 관련자 120여 명이 대거 피검되면서 계획의 실현은 좌절되었다.756)金大商,≪解放直前史의 再照明≫(해성출판사, 1990), 177∼182쪽.

 일제가 단말마의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던 때인 1945년 7월 24일 일제 강점기 최후의 폭탄거사가 柳萬秀·趙文起·康潤國에 의해 京城府民館에서 결행되었다. 폭력배 출신의 일제주구 朴春琴이 항일·반전사상의 격파를 목적으로 급조한 大義黨이 일본과 만주국, 친일 남경정권 대표들을 초치하여 아시아민족분격대회라는 선전극을 개최함에, 세 청년이 직접 제조한 도화선식 폭탄을 행사장인 부민관 내 두 곳에 미리 장치하여 폭발시킨 것이다.757)김용국 외, 앞의 책, 805∼811쪽. 총독과 조선군사령관 폭살이라는 원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일제 고관과 괴뢰정권 대표들을 혼비백산하게 하고 한민족의 끈질긴 항일 의지와 독립열망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시켜 준 쾌거였다. 이로써 항일 민족의열투쟁사의 종장은 멋지게 장식되면서 큰 매듭을 지었다.

<金榮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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