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1) 사회주의사상의 도입
  • (2) 국외 전위정당의 결성과 활동

(2) 국외 전위정당의 결성과 활동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사상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성립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하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사회주의사상의 유입과 동시에 사회주의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특수성에 있었다. 즉 러시아지역에서 한인사회주의단체의 존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1919년 국내에 사회주의사상이 본격적으로 도입·수용되기 이전 러시아 지역에 이주해간 조선인들은 러시아혁명을 직접 경험하고 참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사회주의사상 수용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다른 사상적 조류와의 갈등을 겪지 않고 곧바로 전위당을 창립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의 정치적 세례와 1920∼1921년 내전시기에 조선인 공산주의 그룹은 활발히 출현하였다. 1920년 말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에 16개 이상의 조선인 당 조직이 존재하고 당원 및 후보자수는 2,305인이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각지에서 대규모 선전활동과 군사·조직 활동을 수행했다. 조선어 전단과 소책자가 발행되고 조선인 적군 부대가 편성되어 일본 점령군과 백위군에 항거하여 투쟁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전위당 창립에 노력하여 1918년 4월 李東輝 등이 중심이 되어 韓人社會黨을 결성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대규모 민중운동이 일어나는 정세 속에서 1919년 4월 한인사회당은 블라디보스톡에서 2차당대회를 열고 新民會 ‘좌파’세력을 포함하여 당조직을 확대하였다. 이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은 조선혁명에 대한 전술문제, 코민테른 가입문제, 코민테른에 한인사회당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여 朴鎭淳 등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118) 엠.아.뻬르시츠,<ロシアにおける東方の國際主義者と民族解放運動の若干の問題(1918∼1920년 7월)>(國際勞動運動硏究所 編, 國際關係硏究所 譯,≪コミンテルンと東方≫, 1971), 62쪽.
임경석,≪고려공산당연구≫(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3), 38∼50쪽.
전명혁,<1920년대 공산주의운동의 기원과 조선공산당>(역사학연구소 편,≪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75쪽.
이후 한인사회당은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활동무대를 상해로 옮기게 된다. 이들은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을 창립하였다.

 한편 1920년 1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현 위원회 산하에 한인공산당이 창립되었고 이들도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라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 동시에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국내의 정세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국내에 전위정당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강령>에서 “민족적 해방이 사회혁명의 전제”요, “이 역시 곧 세계혁명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상해파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주로 활동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국내 식민지 조선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동시에 사회주의국가를 세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고려공산당<선언서>는 마르크스-엥겔스(Friedrich Engles)의<공산당선언>에 입각하여 민족해방운동과 무산대중의 해방을 토로하였고 고려공산당<강령>은 “우리는 무산계급의 執政을 자본주의의 폭위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또 보편적 절대 자치의 소비에트정치를 무산계급 집정의 유일의 政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은<강령>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의한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최대 강령으로 선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은 강령이나 노선 상의 차이보다는 통일전선의 대상과 관련된다. 첫번째 대립은 상해의 임시정부 참여 문제였다. 상해파는 고심 끝에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지만 이르쿠츠크파는 이에 반대하고 대한국민의회 계열과 상해임정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또 상해파는 베르흐네우진스크(Вегхне-Учцнск)의 통합대회에서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민족주의진영내의 점진적 문화운동론자를 포함하였으나 이르쿠츠크파는 이들에 대해 고립화 정책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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