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2) 국내 무산계급 운동의 성장
  • (1) 사회주의 분파의 형성

(1) 사회주의 분파의 형성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 그리고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국내에 전위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견지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자금을 둘러싼 문제와 전위당 건설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이들 사이에 최초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신뢰를 상실케 했다.

 이 무렵 국내 각지에서는 합법적인 모습으로 수많은 운동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기성회와 조선노동공제회 등이 전국에 존재하는 노동·농민·청년단체를 망라하는 위상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이들 내부에는 민족주의자·무정부주의자·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1921년 서울靑年會, 1923년 北星會(1924년 북풍회), 1923년 新思想硏究會(1924년 화요회), 1924년 조선노동당 등은 제각기 그 이면에 비합법적 공산주의 그룹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후 합법적인 표면단체인 사상단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서울청년회 내부의 비합법적 조직은 고려공산동맹이 북풍회 내부에는 까엔당이 그리고 조선노동당 내부에는 스파르타쿠스당이 존재하였다. 화요회는 코민테른과 직접적으로 조직적 관계를 맺으면서 주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사회주의자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24년 초부터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등 전국적인 대중운동체를 조직한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에 전위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무렵 사회주의 분파들이 독자적인 모습을 띠고 등장하게 되는 데에는 ‘金允植사회장사건’과 ‘사기공산당사건’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윤식사회장사건’은 한말 대제학을 지냈고 한일합방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던 김윤식의 장례를 둘러싸고 상해파 국내부와 국내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의견 대립으로 일어났다. 상해파 국내세력이 주도하고≪동아일보≫계열의 민족주의세력이 참가한 ‘김윤식사회장 장의위원회’에 대항하여 무산자동지회·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는 ‘김윤식사회장반대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여 마침내 사회장은 취소되었다. 당시 무산자동지회의 김한은 김윤식사회장반대운동은 “귀족사회를 파괴하고 자본가계급 타파와 사회개량가의 매장”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규정하였다.

 1922년 4월에는 ‘사기공산당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국내간부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의 일부를 사적으로 남용하였다고 하여 이들을 주요 대중단체인 조선청년회연합회·노동공제회·서울청년회에서 축출하는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청년회는 내부 분화를 겪으면서 김사국을 비롯한 서울파가 출현하였다. 화요파의 배성룡은<조선사회운동소사>에서 “사기공산당사건관계자의 제명을 역설한 서울청년회는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아주 무산청년운동의 색채를 띠게”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1921년 1월에 조직된 서울청년회는 ‘김윤식사회장사건’, ‘사기공산당사건’을 겪으면서 그들 내부에 존재했던 이론적 경향들이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적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김사국·李英을 비롯한 서울청년회 인물들은 1922년 10월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강령과 조직체계를 갖춘 전위당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사회주의 분파로서 서울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1922년 10월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운동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공업지역과 항만지역 등 산업 중심지에 조직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3년 2월 ‘공산주의 그룹’은 고려공산동맹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김사국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하여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으로 승인받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고려공산동맹은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열었다.119) 전명혁,≪1920년대 국내사회주의운동 연구-서울파를 중심으로-≫(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8), 72∼74쪽.
―――,<서울청년회의 분화와 서울파의 형성>(≪외대사학≫9, 1999), 153∼164쪽.

 서울파가 사회주의 분파로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는 때에 金若水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북성회 그룹도 까엔당(К.Н.Дан)이라는 비합법 전위조직을 창립하여 활발한 대중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120) 전명혁,<1920년대 전반기 까엔당과 북풍회의 성립과 활동>(≪성대사림≫12·13합집, 1997).
박철하,<북풍파 공산주의 그룹의 형성>(≪역사와 현실≫28, 1998).
그들은 1924년 11월에 北風會라는 표면적 사상단체를 통하여 자신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20년 5월 조선노동공제회 내부의 마르크스주의 학습써클에서부터 시작하여 1921년 10월 ‘꼼그룹’을 형성한 북풍파는 주로 일본 등지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을 조직하여 노동운동과 결합하면서 조직을 확장시켜 나갔다.

 김약수를 비롯하여 정태신·김종범·송봉우·李憲 등은 일본에서 1923년 1월 15일 北星會라는 합법 사상단체를 조직하여≪척후대≫·≪전진≫·≪해방운동≫등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사회주의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었다.

 1923년 8월 무렵부터 그들은 국내에 들어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전사업을 수행하면서 조직화 사업을 벌여나갔다. 1924년 1월부터는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남선노농동맹·전라도노농연맹 등을 조직하고 마침내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는데 하나의 축을 형성하여 일제 식민지하 노동자·농민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들은 1924년 4월 17일 까엔당이라는 비합법 조직과 합법단체 건설사를 조직하고, 1924년 11월 25일 까엔당의 표면단체였던 建設社와 焰群社 그리고 개별 사회주의자들을 망라하여 마침내 북풍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조선노동공제회 내부에서 비롯하여 일본의 북성회로 이어지면서 국내 유력한 사회주의 분파로서 자리잡게 되는 ‘북풍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1923년 12월 무렵 일본·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했던 20여 명이 모여 공산주의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1924년 8월 17일 전일·이남두·이정수·이충모·이극광·김연희 등 7명의 발기로 스파르타쿠스당의 표면단체로서 조선노동당이라는 사상단체를 결성하고 노동학원을 설치하여 계급의식과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출판 및 정치교양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사를 두고 기관지≪무산계급≫을 발행하려 했지만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고 발행금지를 당했다.121) 전명혁, 앞의 책, 4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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