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2. 조선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 2) 국내 무산계급 운동의 성장
  • (4) 화요파와 민중운동자대회

(4) 화요파와 민중운동자대회

 화요파는 1924년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를 화요회로 개칭하고, 1925년 1월 3일 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 등에게 신년간친회 개최를 제의하여 4단체 연합하에 신년간친회를 개최했다. 150여 명의 사회운동자들이 모여 曺奉岩의 개회사와 김찬의 사회로 ‘재경사회운동자신년간친회’를 개최하였다.

 화요파가 을축년(1925) 벽두부터 ‘4단체 간친회’를 개최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1924년 4월 꼬르뷰로 국내부에서 제명한 북풍파의 김약수에게 화요파가 다시 간친회를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당시 가장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갖춘 서울파(서울청년회)를 ‘신년간친회’에서 제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화요파는 이 무렵 블라디보스톡의 오르그뷰로와 관계를 회복하고 이를 통해 국내 당건설에 대한 시기와 지침을 전달받은 것이 분명하다. 또한 1924년 말부터 화요파는 합법·비합법적 접촉과 회합을 통해 서울파를 제외한 국내 사회주의조직들과 연합을 시도하였고 ‘재경사회운동자신년간친회’를 통해 화요파와 북풍파·조선노동당 일부의 결합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화요파는 서울파를 제외하고 북풍회·조선노동당의 일부세력을 형식적으로 아울러 당창건을 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서울파가 조선노동당과 더불어 조선노동교육자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화요파는 북풍파의 협조를 얻어 2월 17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방침을 토의코자 사상·농민·노동·청년·형평·여성 등 각 운동단체의 대표로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147)≪동아일보≫, 1925년 2월 19일.한다는 대회<취지>와 준비위원 72명의 명단을 일간지에 발표하였다.

준비위원은 姜達永·金燦·曺利煥·白光欽·金璟載·金鴻爵·陳秉基·全無·金在鳳·具然欽·朱世竹·洪悳裕·尹德炳·許貞淑·朴憲永·金丹冶·林元根·曺奉岩·朴一秉·權五卨·崔元澤·李準泰·安基成·林亨寬 등 화요파 인물들과 鄭雲海·李憲·金裕昌·朴炳斗·鄭晋武·金大鳳·崔允鈺 등 북풍파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다(≪조선일보≫, 1925년 2월 19일).

 화요파는 각 사회운동단체를 통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지지운동을 조직했다. 3월 7일에는 신흥청년동맹과 革靑團이 총회를 열어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 3월 9일에는 신의주 新灣靑年會가 집행위원회를 통해 민중운동자대회를 촉성할 것을 결의했다.148)≪조선일보≫, 1925년 3월 12일. 3월 11일 마산의 사상단체인 彗星社와 전남 광양 勞農聯合會가 민중운동자대회 참가를 결의했다. 3월 12일 경북 예천의 신흥청년회와 마산의 勞農同友會·黃州靑年會도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 경상북도 안동의 사상단체 火星會도 월례회를 열고 민중운동자대회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결의하고 진주의 형평사와 형평청년회도 임시총회를 열고 강상호의 사회로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149)≪조선일보≫, 1925년 3월 15일.

 화요파는 1925년 3월 15일 경성청년회 등 20여 단체를 모아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應援會를 조직했다. 서정희가 임시의장을 맡아 경과보고와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응원방침에 대한 토의를 했다.150) 경성급수부조합·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경성여자청년동맹·여성동우회·경성
여자청년동맹·여성동우회·경성양복직공조합·신흥청년동맹·경성양화직공조합·조선형평사총연맹중앙총본부·형평사정위단·혁청단·조선무산자동맹·염군사·시계종업원친목회·프롤레타리아트사·신흥청년사·경성청년운동사·해방운동사·경성청년회·화화사·조선노동당·북풍회 등 23단체가 참가했다. 또한 집행위원으로는 홍순준·김연희·김창준·전일·이은식·이극광·○오택·황성하·한상우·이경춘·최봉·이종성·이민한·정종명·김지호·민창식·송영·박래원·이병립·임성웅·우○운·배일선·구창회·강균환·송봉우·김청형·손영극·이호○·김장현·신철·마명·김약수·서정희 등 33인이 선출되었다(≪조선일보≫, 1925년 3월 18일).
이 응원회에서 주목할 것은 북풍회와 조선노동당이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북풍회의 신철·마명·김약수·서정희 등과 조선노동당의 전일·김연희·이극광 등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13인회’의 결렬 이후 화요파가 오르그뷰로의 당건설방침에 따라 북풍파와 조선노동당과 다시 연대하여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면서 조선공산당을 건설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1925년 3월 24일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 제4회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화요파’는 윤덕병·최원택·장준·신동호·김유창·정운해·김부곤 등 7명을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적극 후원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청년총동맹 및 재경해방운동단체 연합간친회 결의사항 가운데 민중운동자대회에 반대하는 단체에 ‘노총’을 넣은 조항을 취소하라고 경고했다.151)≪동아일보≫, 1925년 3월 26·29일.
≪조선일보≫, 1925년 3월 26일.
상무집행위원 7인 중 장준만 ‘서울파’였고 나머지 위원은 모두 ‘화요파’였다. 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간담회의 결의에 대해 서울파는 이 회의가 중앙집행위원 중 임종환 등 몇 사람에게 정식통고가 없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하며 다시 정식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할 것과 민중운동자대회의 소집을 방지할 것을 주장했다.

 또 3월 30일 진주 청년회관에서는 경남민중운동자간담회가 26개 단체 출석대표 46명의 참가로 개최되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해방운동선상에 적합함을 인하고 경남 각 단체 참가를 권유할 일” 등을 결의했다.152)≪조선일보≫, 1925년 4월 2일. 같은 날 함남 흥원군 삼호에 있는 프로청년동맹도 정기총회를 열고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153)≪조선일보≫, 1925년 4월 3일. 4월 13일 光州 노동공제회관에서 전라노농연맹 제2회 정기총회가 열렸다. 집행위원장 서정희의 개회사가 있고 임시의장으로 이영민과 신명준이 선출되어 노동·소작문제 등에 대한 결의와 함께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154)≪조선일보≫, 1925년 4월 16일.

 마침내 화요파는 1925년 4월 20일 서울시내 하세가와 조(長谷川町)의 경성공회당에서 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4월 18일까지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단체는 노농단체 263, 청년단체 100, 형평단체 18, 사상단체 44 등 425개 단체의 대표자 508인이었다.155)≪조선일보≫, 1925년 4월 20일.

 그러나 민중운동자대회 몇 시간을 앞두고 일경의 집회금지로 대회가 무산되자 이에 분개한 대의원 300여 명이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경에 의해 공원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대 200여 명이 그날 밤 종로2가 단성사와 우미관 앞에 모여 붉은 기 5개를 들고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 만세”·“무산자 만세”·“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를 외치며 종로3가로 행진하여 수천 명의 군중이 합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른바 ‘赤旗事件’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구청년회의 申哲洙와 마산노농동우회의 金尙珠 등 14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156)≪동아일보≫, 1925년 4월 22일·5월 3일. 김상주는 4월 17일 조직된 화요파 조선공산당 1차당대회에 참가했었다.

 화요파가 서울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25년 4월 15∼17일 3일간에 걸친 전조선기자대회의 마지막 날인 4월 17일에 일경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창립된 화요파 조선공산당의 지도하에 국내의 모든 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자신의 대중적 세력을 내외에 과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화요파의 민중운동자대회는 서울파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쳤다. 서울파는 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 대중조직이 발달해가는 과정에 있는 조선의 노동·농민·청년운동을 혼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부당성을 지적했다.157)≪조선일보≫, 1925년 3월 3일. 또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 출신의 李敏用도 화요파의 민중운동자대회를 반대하였다. 그는 “만약 그들이 운동의 유일을 허락한다면 왜 양총동맹으로써 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민중운동자대회를 발기한 조봉암은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이고 김찬은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민중대회를 소집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158) 李敏用,<片山 同志에게 보내는 보고>(1925년 5월 30일), 3쪽.

 화요파의 趙東祜는 코민테른에 민중운동자대회가 공산당의 영향하에 수행된 조선혁명운동의 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었음과 이 운동은 민중에게 사회주의사상의 세례를 주었고 또한 이 대회는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민을 어떻게 선동하는가 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번째 시험이었다라고 그 의의에 대해서 보고하였다.159) T.H.Cho, Report:Delegate of KCP, Aug.8, 1925, pp.121∼122.
РЦХИДНИ ф.495 оп.135 д.110(조동호-조선공산당 파견대표,<보고>, 1925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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