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운동
  • 1) 창립 배경

1) 창립 배경

 신간회의 창립은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협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 세력이 신간회 창립에 나서게 된 계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민족주의세력은 당시 풍미하던 자치론에 대한 적극적 대응책으로 신간회 창립에 나서게 되었고, 사회주의세력은 그들의 운동노선인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민족주의세력은 소위 민족주의 좌파 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민족주의 우파 또는 타협적 민족주의세력이 주장하던 자치운동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자치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 가을부터였다. 동아일보사와 일부 천도교 간부들이 주동이 된 민족주의 우파진영은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와 총독부의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고 우익세력단체인 硏政會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이들은 李光洙로 하여금 이 조직의 이념적 지향이 될<民族的 經綸>이라는 논설을≪동아일보≫에 게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논설이 자치운동에 대한 주장이라고 하여 세간에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자, 민족주의 우파측의 연정회 조직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301)<민족적 경륜>의 핵심적 내용은 “총독부가 허하는 범위 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민족적 경륜>은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 타협주의 세력과 비타협주의 세력의 대립을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박찬승,≪한국근대 정치사상사 연구≫, 역사비평사, 1992). 자치론이 재차 시도된 것은 1926년 9월 말이었다. 9월 말 자치운동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한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10월 초순 조직 준비에 착수하여 朴熙道·金俊淵·趙炳玉·金麗植·崔元淳·韓偉健·沈友燮·崔南善·李光洙·卞榮魯·金鑽永·洪命熹·朴承喆·白寬洙·閔泰瑗·洪秉璇·金弼秀 등과 개별접촉에 나섰다.302) 이때 자치운동에 반대하고 있던 조선일보사의 安在鴻과 金俊淵이 이 사실을 民興會 회원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에 민흥회의 明濟世는 최린을 찾아가 만약 자치운동단체 조직을 강행할 시에는 이를 극력 방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0월 13일 자치운동자들은 시사간담회라는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발기계획을 발표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곧 민족주의단체를 조직해야 할 필요도 없고 경비와 인물도 없으니 이 문제는 당분간 보류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논의후 해산하였다.303)<民族運動槪觀>(≪齋藤實文書≫, 고려서림 영인본, 1926), 238∼240쪽. 이러한 자치론자들의 동향은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의 경계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따라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民族黨’ 결성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그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신간회 결성에 임하게 되었다.304) 자치론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박찬승, 앞의 책 참조.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 시도는 신간회 이전에도 시도된 바가 있었다. 朝鮮共産黨은 1926년 2월 26일 제13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족해방의 조선독립과 공산정치의 통일기를 획책하고 민족·사회 양 운동자를 통일하기 위한 國民黨조직의 전제로서 천도교를 기초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305)京城地方法院檢査局,≪第2次朝鮮共産黨事件檢擧ニ關スル報告錣≫(1926)(≪한국공산주의운동사≫2, 1986, 청계연구소, 373∼377쪽 재인용). 이 결의는 사회주의자들이 행한 최초의 민족협동전선 논의라는 점과 구체적인 조직방법이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결의에 따라 당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姜達永은 좌파 민족주의자들을 접촉하였다. 1926년 3월 10일 천도교 간부 權東鎭의 집에서 李鍾麟·申錫雨·安在鴻·權東鎭·朴東完·吳尙俊·兪億兼 등 7인과 회합하고 비타협적 민족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공동작전을 펴는 데 대해 논의했다. 그후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당원에 대한 검거로 당이 와해상태가 되자, 조선공산당의 민족협동전선론은 제3차 조선공산당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신간회 창립배경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정우회선언>이었다. 이를 주도한 단체는 一月會였다.306)일월회는 1925년 1월 재일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北風會의 재일본조직인 北星會를 해체하고 조직한 사회주의단체였다. 설립 당시 회원수는 많지 않았으나 여타 재일조선인단체의 간부를 겸하는 인물이 많았던 관계로 재일조선인운동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창립시부터 국내운동의 파쟁을 비판하고 민족협동전선을 표방하였던 일월회의 지도자 安光泉은 河弼源 등과 더불어 1926년 8월 하기 휴가를 맞아 귀국하였다. 귀국후 제1·2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국내 사회주의운동세력이 위축된 사실을 알게 된 안광천 등은 곧바로 正友會에 가입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우회의 주도세력은 화요회를 중심으로 한 四團體合同委에서 일월회 계열로 바뀌었다. 정우회를 장악한 안광천·하필원 등은 1926년 9월 28일 정우회 위원을 補選하여 새롭게 진용을 갖추는 한편, 11월 15일<정우회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때 이미 안광천은 金錣洙에 의해 재건된 제3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도 겸하고 있었다. 이 정우회선언은 후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에 참여하는 이론적 배경이 된 중요한 선언이었다. 정우회선언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과거의 분열에서 벗어나 사상단체를 통일하고 구체적으로 전위적 운동을 행하여야 한다.

② 교육을 통하여 대중을 조직화하고 질적·양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그것을 기초로 일상투쟁을 하여야 한다.

③ 종래의 국한되었던 경제적 투쟁에서 계급적·대중적·의식적 정치형태로 전환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일시적인 공동전선이 필요하다.

④ 이론투쟁으로 운동의 진로를 제시하여야 한다.

 (≪조선일보≫, 1926년 11월 17일).

 이 정우회선언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③항이다. 여기에는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적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방향전환의 내용과 민족협동전선론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정우회선언이 발표되자, 정우회와 조직적 대립관계에 있었던 서울청년회는 정우회선언을 놓고 내부 진통의 결과, 신·구파로 대립하였다. 신파는 정우회선언을 찬성하였으며 구파는 종래 노선을 지지하였다. 이에 따라 구파의 영향하에 있었던 前進會는 1926년 12월 15일 정우회선언에 대한 결의문과 검토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전진회를 중심으로 한 서울청년회 구파의 정우회선언에 대한<검토문>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정우회선언은 국내외 수많은 사상단체 및 노동·청년단체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는 사회주의 단체가 민족협동전선에 대해 결성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1926년 초 사회주의세력은 크게 4단체합동위와 전진회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때 4단체합동위는 동 단체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던 화요회·북풍회의 간부 다수가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으로 체포된 까닭에 세력이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 반면 전진회는 1926년에 들어서 민족협동전선을 예비하는 적극적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한 조처로서 전진회는 1926년 2월 20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발의하였다. 전진회의 이러한 움직임은 해외의 민족해방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1926년 3월 전진회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된 비타협적 민족유일당운동단체인 民族黨籌備會에 참여하였다. 전진회의 주도세력인 서울청년회 세력은 민족당주비회가 국내조직을 구축하려는 것을 기회로 자파 중심의 朝鮮民興會를 발기하였다.

 1926년 7월 8일 朝鮮物産獎勵會館에 모여 발기된 조선민흥회는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자들과 조선물산장려회계의 민족주의자들의 제휴로 이루어진 한정된 규모의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조선민흥회의 발기취지는 “조선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분투 노력함에는 반드시 전 민족적인 각 계급의 역량을 총집중한 조직력의 활동으로서야 가능할 것이므로 조선민족의 중심세력이 될 유일한 조직체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민흥회 발기준비회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립준비위원과 상무위원까지 선출한 조선민흥회는 일제에 의해 발기총회와 창립총회를 모두 금지당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927년 2월 11일 조선민흥회는 신간회 대표들과 회동하여 신간회에 무조건 가입하기로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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