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운동
  • 2) 신간회의 창립
  • (1)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운동론

(1)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운동론

 <정우회선언>이후 정우회는 협동전선 결성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산하 사상단체들을 해체시켰다. 반면 서울청년회는 정우회선언에 대한<前進會檢討文>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간회운동론인 사상단체찬반론·兩黨論·淸算論의 주요한 이론적 바탕이었다.

 전진회는 정우회선언 내용 중 민족협동전선 결성에는 적극 찬성하였다.311)水野直樹,<新幹會運動に關する若干の問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14, 1977), 97∼98쪽.
――――,<新幹會の創立をめぐつて>(≪近代社會社會思想≫, 1977), 292쪽.
우선 전진회가 발표한 검토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우회선언이 주장하는 협동전선을 만드는 데는 찬성하나 그것은 타협운동이다. 어떠한 조직에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 독자성 혹은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조직형태로 제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언명되어야만 타협운동의 비난을 벗어날 수 있지만 정우회선언은 이 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전진회검토문>이 발표된 다음, 이른바 兩黨論을 내세우는 빌미가 되었다.

 둘째, 정우회선언은 부르주아세력을 일시적 동맹자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전진회는 ‘언제까지 동맹할 것인가’와 ‘어떻게 동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정우회선언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셋째, 정우회선언은 “경제적 투쟁의 형태에서 일층 계급적·대중적·의식적인 정치형태로 비약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경제적·정치적 투쟁의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 사회주의운동이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적 투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본의 노동조합운동이 합법적 명분을 가진 무산계급정당으로 의회로 진출해야 할 것인가 혹은 비밀전위당으로 공산당을 우선 조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정우회와 조선공산당은 정우회선언 발표를 전후하여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모든 사상단체를 해체시키려고 하였다.312) 사상단체는 사회주의사상을 연구·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합법단체인데 실제로는 지하 공산주의그룹의 전위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상단체 해체에 관한 논의가 지상에 등장한 것은 정우회선언이 발표된 1926년 11월이었다. 한편 조선공산당의 표면단체인 정우회는 선언을 발표하기 이전에 이미 모든 사상단체의 해체공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舜昻이란 필명의 글<사상단체에 대한 나의 偏見>에서는 사상단체 해체는 不可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각종 사상단체 통일체로서의 단일사상단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우회-조선공산당세력과 전진회-서울청년회 사이에 치열한 찬반론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사상단체해체론의 요점은 ① 사상단체가 계급운동의 원시적·양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소임은 끝났다. 따라서 이제는 목적의식적·전계급적 정치운동의 단계이므로 단일통제기관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상단체는 그 형성에 방해가 된다. ② 사상단체는 파벌대립의 온상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상단체해체반대론자들은 ① 단일통제기관이란 결국 계급정당을 말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며 신간회는 계급정당이 아니라는 점, ② 사상단체의 소임은 계급운동의 양적 팽창에도 있지만 그보다 질적 순화를 도모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데 현실의 운동의 질은 유치한 단계라는 점, ③ 사상단체가 파벌대립의 근원이라면 노동·농민·청년·여성단체 등도 해체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점 등을 들어 반대하였다. 사상단체해체반대론은 “민족당 혹은 민족단체의 강령을 승인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속에서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계급적 정신을 고양·결정하려는 것이 동기가 되므로 민족당에 들어가기 위하여 사상단체를 해체해야 할 이유는 없다”313) 독고독,<사상단체 해체 是非>(≪조선지광≫65, 1927), 3·9쪽.고 대응하였으나, 그것은 새로운 이론적 해답이 되지는 못했다. 사상단체에 대한 논의는 1927년 4월 이후 자취를 감추었지만, 서울청년회가 사상단체해체반대론이나<전진회검토문>에서 제기한 문제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兩黨論으로 이어졌다.

 양당론은 전진회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통하여 표명한 것으로, 무산계급정당과 민족단일당이 병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전진회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조직을 결의한 것은 1926년 2월 17일이었다. 그러나 전진회가 양당론을 구상한 것은 그 이전부터로 보인다. 전진회는 구상대로 1926년 2월 무산계급정당의 준비기관으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7월에는 조선민흥회를 발기하였다.314) 일제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조직이 결의된 것은 전진회가 조선공산당 제1차검거사건으로 조공계의 세력이 약화된 기회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전진회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무산계급정당의 준비기관으로 규정한 것은 첫째, 전진회는 이미 민족협동전선이 결성될 것을 예상하고 거기에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독자성과 주도권을 위해 조직적으로 대비하였다. 둘째,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는 ‘무산계급정당의 준비기관’이므로 조선공산당과 같은 지하단체는 아니지만 그 명분은 지하단체가 맡을 수 없는 계급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조선공산당과 같은 지하당의 역할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는 조선공산당과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조선공산당에 대한 조직적 대립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대책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1926년 5월 그 산하단체들을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자파 중심으로 이끌어 가거나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는 1927년 5월 16일부터 3일간 열렸다. 대회 첫날, 발언권을 얻은 在日本無産靑年同盟의 崔益翰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의 非常設論이다. 그것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일시적인 조직으로 그치게 하자는 주장이며,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의 실제기능을 분산 혹은 파괴하자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둘째,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와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로 성립된 신간회가 두 개의 정당으로 서로 대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315)≪동아일보≫, 1927년 5월 18일. 양당론이란 명칭은 바로 최익한의 이 주장에 의해 연유된 것으로서, 이 발언은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양당론은 첫째, 전진회가 이전부터 구상해온 것으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를 통해 표출되었다. 전진회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상설기구화하려 하였으나 조선공산당 계열과 조직적 대립을 거친 끝에 비상설화됨으로써 사실상 이 논쟁이 실천적 문제까지 확대되지는 못했다.

 둘째, 또한 양당론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와 신간회를 두 개의 정당, 즉 전자를 무산계급정당으로, 후자를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로 규정한 조선공산당 계열에 의해 일방적으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이미 코민테른의 조선지부로 승인된 상황에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가 정당으로 규정된다면 무산계급운동기관으로서의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는 존립명분과 이론적 기반을 잃고 마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계열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정당적 조직으로, 전진회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가 정당은 아니나 존립시킬 가치가 있는 단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논쟁의 핵심을 두었다.

 셋째,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의 존립가치란 바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분리는 예비한 무산계급정당의 준비기관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정당은 그 조직 내에 각종 조합(단체)을 포괄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그 준비기관 역시 의회적 기능의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형식으로 존재하여 각 단체들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고 지하의 조선공산당이 맡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넷째, 조선공산당측은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가 신간회에 대항하는 조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전진회측은 두 단체의 관계에 협동과 대립이 병행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우 협동은 반제투쟁에서 공동전선을 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대립이 필요한 것은 계급적 독자성을 강조한 것이다.

 다섯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독자성과 주도권의 문제이다. 이것은 파벌의식과 더불어 양당론이 대두되는 가장 근본적인 모티브였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는 결국 상설과 비상설을 두고 투표를 벌인 결과 비상설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측이 승리함으로써 일시적 단체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양당론의 종결은 “그치지 않던 파쟁에 종막을 닫게 된 것과 조선내 모든 운동세력이 단일화되는 동시에 옳은 방향으로 전환되는 사실을 대중에게 자각시켰다.”316)<사회단체중앙협의회 상설론>(≪현대평론≫, 1926. 6), 1쪽.

 한편 淸算論은 1927년 말부터 1928년 초에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논의되었던 이론이다. 그 내용은 계급적 독자성을 버리고 신간회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전진회가 새로운 비밀전위당인 비이론파 조선공산당(일명 春景園黨)을 조직하는 전략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었다. 청산론자로 불렸던 사람은 張日星·洪陽明·朴衡秉·尾星生·扶蘇山人·HS생·金萬圭·權泰錫·洪起文·許一 등이었으며,317)讚注生,<조선청년총동맹집행위원장 박형병씨를 駁함>(≪조선지광≫77, 1928), 75쪽.
光 宇,<淸算主義の撲滅と朝鮮XX黨當面の中心的問題>(≪朝鮮前衛黨當面の問題≫, 42∼44쪽;≪理論鬪爭≫5(1928), 3·20쪽).
이들은 주로 서울청년회 계열의 인물들이었다. 청산론은 사상단체해체반대론에서부터 제기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청산론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이 민족운동내의 한 ‘요소’, 한 ‘경향’이며, 신간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독자성은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산론은 신간회운동에 대한 문제제기였다기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이 파쟁의 전술로 제기된 것이었다. 즉 당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안광천이 신간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 쟁취를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주장된 것이 바로 청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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