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1) 국내외 항일여성운동
  • (1) 국내 항일여성운동

(1) 국내 항일여성운동

 한국 근대여성운동은 일제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신천지의 광복조국을 세우려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근대여성운동은 여권통문을 선언하여 인간으로서의 여성해방을 외친 1898년의 贊養會운동을 제외하고는 줄곧 구국운동에 평등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으며 구국운동을 통해 단연코 남녀평등권을 획득하겠다는 신념을 가졌었다. 그리고 남녀평등적 구국이념의 실천은 3·1운동을 통하여 더욱 확대되었다.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내외에는 많은 항일구국단체들이 조직,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 중 부녀들에 의하여 조직, 활동된 것도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 등이다. 이 밖에도 평남 강서의 반석대한애국여자청년단, 평남 순천의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 평남 안주의 부인관찰단, 평남 대동군의 대한독립부인청년단, 평남 개천군의 여자복음회,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 조직된 결백단 등이 있었다.485) 朴容玉,≪韓國近代女性運動史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173∼191쪽. 이들 항일 구국여성단체들은 남자들이 조직한 항일단체들과 연결되기도 하고, 또한 독립전쟁이 필연코 일어날 것이므로 그 때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과 같은 간호 역할을 하고자 한 결백단과 같은 독립전쟁 준비·참여단체들도 있었던 것이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도 그 조직에 적십자장·결사장을 각각 2명씩 임명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역시 독립전쟁에의 참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도 적십자장과 적십자員을 두고 있음은 역시 독립전쟁에의 참여를 당연시하였던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항일여성독립운동의 이념은 민주적 평등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취지문에서 부녀들도 ‘국민된 의무’를 해야 한다는 평등한 국민으로서의 구국참여운동을 주장하였으며,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도 독립운동을 남자들에게만 맡긴 채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국민 평등적 구국참여를 내세웠던 것이다. 또한 남성들도 항일독립운동에 여성들이 동반참여해 줄 것을 희망하였다. 청년외교단과 연관을 가진 대조선애국부인회의 조직 당시도 외교단의 총무인 이병철과 임정 파견요원은 신교육을 받고 신앙심이 강한 여자들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남자와 동반활동을 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486) 朴容玉, 위의 책 참조.

 한국여성계를 대표하는 이상의 항일여성단체들의 활동은 그 후 일제의 사찰에 의하여 활동인들이 거의 모두 체포·구금되어 그 조직들이 와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평등에 기초한 여성들의 조국광복에 대한 투철한 정신은 그 뒤로도 여러 형태로 이어져 나갔다. 특히 여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에 대한 참여정신은 일제의 비인도적인 무자비한 탄압을 스스로 극복487) 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은 약 1만여 명이며, 총 기소인 9,411명 중 여자가 587명이고, 제1심 유죄 판결자 8,471명 중 여자 153명이고, 제3심 유죄 판결자 7,816명 중 여자 129명이었다. 일제는 체포된 여학생이나 젊은 여자의 경우는 의례히 나체고문을 하는 등 만행을 하였으나, 유교적인 순결상실을 내세워 자결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출감 뒤 소감에서 조국을 위한 일이라면 다시 투옥이 되어도 좋다고 하였다.하였던 까닭에 더욱 투철하였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를 행하면서 한민족에 대한 정신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을 한층 강화하였다. 1922년에 개편한<조선교육령>에는 한국인 교육을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에 치중하게 함으로써 지도적 사회인으로서의 육성을 억제하였다. 또한 교과목에서는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삭제하고 한국어교육을 제한하였다. 반면 일본어 교육시간을 확대하고 일본역사와 지리 교과를 신설하는 국정교과서 편찬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일제에 강제 동화시키려는 노예교육 강화정책이었다. 3·1운동으로 배일감정과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진 여학생들은 이러한 식민지 교육정책에 반발하여 한민족에 대하여 억압적인 일인교사를 배척하고 일어교과서를 찢어 일어 교육받기를 거부하는 등의 행동을 과감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맹휴학과 비밀결사로 발전하여 1920년대 여학생들의 본격적인 항일운동으로서의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27년 5월 27일부터 시작하여 9월 27일 경에야 겨우 수습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맹휴이다. 이 맹휴는 한국인정신을 말살시키는 일제 식민지 여성교육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맹휴 학생들은 일본인 사감 나카시마(中島)와 교무주임 사이토(齋藤)를 면직시키고 일본인 재봉선생을 조선인으로 임명하고, 조선인교사 채용을 늘릴 것 등을 투쟁안건으로 제시하였다.488)≪東亞日報≫, 1927년 5월 27일. 4개월에 걸친 숙명의 맹휴에는 숙녀회·학부형회·양명회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학생들은 줄기차게 항일 맹휴를 해 나갔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근우회·중앙여자청년동맹 등 사회단체의 지지·성원도 받았다. 이처럼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교무주임은 사표를 제시하고 재봉교사는 숙명 출신인 吳慶善이 부임489) 淑明50年史編輯委員會,≪淑明五十年史≫(4289:1956), 167쪽.하게 되는 등 학생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또한 1928년 4월에 일어나 2개월이나 계속된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동맹휴학도 독립정신이 강한 한국인 교무주임 申時澈을 이유 없이 파면한 것에 반발하여 3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그 유임을 요구하여 일으킨 것이었다.490) 서울女商五十年史編纂委員會 편,≪서울女商五十年史≫(1976), 38∼39쪽.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학생들이 그 영향을 받아 독서회 등의 비밀결사운동이 적지 않았다. 여학생들도 이러한 결사운동체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더욱 조직화하였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張梅性·朴玉蓮 등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쟁취,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少女會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관련학생들이 구속되고 장매성은 징역 2년에 처해졌다.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항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통하여 보다 과격화·조직화되어 전국적 항일학생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들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맹휴를 비롯하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가두 시위항쟁을 하였다. 같은 해 12월 2일에는 식민지 교육제도를 절대 반대하고<치안유지법>을 즉시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총궐기를 격려하는 격문 8,000매가 서울의 여러 학교에 살포되었는데 경성여상·동덕 등 여학교에도 살포되었다. 12월에 들어서면서 서울 학생들의 항쟁 憤氣는 충천하였다. 12월 10일에 숙명과 근화여학교가 휘문·배재 등에 이어 만세를 불렀고, 11·13일에는 이화·경성여상·동덕·실천여학교들이, 13일에는 배화·진명·중앙보육·정신여학교가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였다.491) 鄭世鉉,≪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一志社, 1975), 378∼384쪽. 학생운동 저지를 위한 강제 조기방학을 마치고 1930년 1학기가 시작되자 학생들은 더 조직적이고 강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성여상·실천여학교·동덕여고보·정명여학교·배화여고보·진명여고보·숙명여고보·경성보육·태화여자관 학생들이 교내외에서 궐기하였다.492) 鄭世鉉, 위의 책, 385∼394쪽. 지방에서는 개성의 호수돈여고보·미리흠여학교, 전주의 기전여학교, 진주의 일신여고보, 부산의 부산여고보, 평양의 평양여고보·숭의여학교·정의여학교 등이 맹휴와 항일학생 시위에 적극 동참하였다.493) 鄭世鉉, 위의 책, 385∼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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