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5) 형평사의 활동
  • (2) 생활생존권 수호운동

(2) 생활생존권 수호운동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백정은 특정 산업분야에서 기득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생존권과 관련되는 문제로 형평운동가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특히 초기의 파벌대립 이후 혁신동맹이 총본부를 장악하게 되면서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생활생존권 수호운동은 가진 계층·계급으로부터 생존에 관계되는 권리를 확보하려는 투쟁 혹은 운동이었고, 형평사원들의 더 나은 경제생활 영위를 위한 방편과 관계되는 것이다. 이 운동은 반제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띤 것이었으며 대부분이 일제 통치정책의 철폐나 수정을 의미하였다.

 첫째 도수장 관련 문제였다. 19세기 말에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도수장에 대한 행정적 규제가 심해지고 일본인들을 포함한 자본가의 투자가 늘어나게 되어 도수장에 대한 백정의 권한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르러 도수장의 운영과 소유권은 지방관청이나 그 지원을 받는 일본인들 단체로 넘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평사의 목표는 형평사원들이 예전처럼 그 운영권을 되찾는 일이었다.

 또한 도수장에 종사하는 도부에 관한 문제는 특히 무산사원의 문제로 크게 대두되었다. 도부들의 임금인상과 작업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고 이의 관철을 위해 동맹파업 등의 집단 행동을 통해 도수장 소유자나 관리들과 대립하였다. 수원에서처럼 도부 급료 지급방법의 개선을 요구한 경우도 있으며, 한 지역의 투쟁이 형평사 조직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알려져 다른 지역과 연대한다거나 총본부 차원에서의 투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함남 흥원에서는 도부들이 단체교섭을 벌여 지방관청과 임금인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또 형평사의 활동 쟁점도 도부들의 임금인상이나 작업환경의 개선뿐만 아니라 세금에 관련된 문제로도 활동을 넓혀 나갔다.

 또한 형평사의 생활생존권 문제 가운데 중요시된 것은 수육판매에 관련된 문제였다. 수육판매업은 전통적으로 백정의 직업으로서, 이의 침해는 사원들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수육판매업과 관련하여 형평사가 가장 활발하게 취했던 활동은 수육판매조합의 결성이었다. 이것은 육가 단합, 공동생산과 공동판매, 수육판매장소에 관한 문제를 수육판매조합의 결성을 통해 수육판매업에서의 독점권을 유지하려는 운동이었다.

 수육판매조합 결성 운동 이외에도<생산물 공동직수출에 관한 건>·<육가 지정의 건>·<수육판매장소에 관한 건>·<수육판매권 침해에 관한 건>·<畜牛移動橫使用 건>등이 결의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관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형평사는 사원끼리의 경제적 불화에 대한 조정의 역활도 담당하였다.

 한편 백정의 전통적인 도수관련 산업 가운데 이윤이 가장 많은 가죽산업도 형평사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다. 일부 분사에서는 관청이나 일본인 친목단체, 또는 부유한 개인에게 넘어간 건피장(가죽 건조장)의 소유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소유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여의치 않으면 새로이 건피장을 신설하려 노력하였다.

 또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한 우피제품의 공동구매 및 공동 판매망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더 나아가 피혁조합이나 피혁공장을 설립한다든지, 우피관계 회사의 설립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기 때문에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기타 구체적인 사실은 나와있지 않지만 많은 지분사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도수관련 산업문제를 포함하였다고 생각되어지지만, 포괄적으로 산업진흥책이라든지 사원들의 경제 생활문제의 형태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많은 지분사에서<사원 생활문제의 건>이 주요 안건으로 결의되었다.

 백정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전통산업인 유기제조에 관한 문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부 분사에서 논의된 유기조합 결성문제는 1929년과 1930년의 정기 전국대회에 상정되었던 산업별 조합결성의 한 부분에 포함될 정도로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도부·수육업자·피혁상들처럼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았고 첨예한 이해관계에도 얽혀 있지 않았던 유기업자들은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있어, 실제로 그들이 형평사 활동으로 어떤 구체적인 혜택을 얻은 것 같지는 않다.

 이상 살펴본 형평사의 생활생존권 운동은 형평사내에서도 사원들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그 주장하는 바가 달랐다. 경제력에 기초하여 활동방향에 대해 견해차이가 생겨나자, 사회주의 계열의 사원들은 이것을 무산사원과 유산사원의 분화로, 무산사원에 대한 유산사원의 착취로 인식하였다. 대다수의 형평사원들은 도수장 노동자인 도부나 피혁공장의 노동자들로 가난한 무산사원이었고, 이들은 임금인상이나 작업환경의 개선 등을 위해 도수장이나 피혁관계 공장의 소유자·관리자들과 대립하였다. 반면에 수육판매점, 즉 정육점을 경영하는 사원들은 다른 사원들보다 부유하였으며, 도수장·건피장을 경영한다든지 또는 피혁관계 공장들을 설립하는 것은 대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에 이 관계에 대한 운동을 벌이는 것은 소수의 유산사원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 후반 급진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지도력의 분열, 파벌투쟁, 더 나아가 형평사 해소론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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