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4. 형평운동
  • 6) 형평사의 해소
  • (4)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과 형평사의 종언

(4)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과 형평사의 종언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이 언론에 처음으로 보도된 것은 1933년 1월 27일자≪동아일보≫였다.≪동아일보≫는 “8개 도에 달한 대검거, 현재 50여 명 취조 중, 형평운동의 해소를 부르짖고 적화운동. 衡平秘事事件 益擴大”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기사의 내용은 검거된 형평청년들은 백정의 해방은 현재의 형평운동보다는 계급운동의 일부분이어야 한다고 하여 형평사 해소를 주장하는 동시에 적화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32년 연말부터 시작된 형평운동자 검거선풍은 제2차·3차·4차에 걸쳐 전국각지에서 100여 명을 검거하여 7개월간이나 취조하다가, 이들중 徐光勳 등 13명은 형평청년전위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치안유지법으로 구속하였다.

 형평전위동맹이라는 단체가 실제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형평사내의 커다란 한 줄기를 이루었던 계급해방을 통한 백정의 인권해방을 부르짖던 부류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표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형평사를 떠나 형평사내에서 이들의 세력은 소멸되었다.

 형평사를 해소하여 무산사원 중심의 직업별 조합인 도부조합을 조직한다든가 또는 형평운동을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급진파는 완전히 소멸되고, 단지 경제생활 중심의 활동을 하는 이익단체, 친목단체로 완전히 전환하게 되었다. 우육판매산업에 비사원들의 침투 반대와 저지를 위한 활동, 피혁조합 설립 논의, 건피장 관리권의 형평사원으로의 이전 요구 등 경제적 이익을 위한 활동만이 강조되었다.

 이같이 형평사는 1931년의 해소논쟁과 1933년의 형평전위동맹사건을 겪으면서 그 활동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1933년 말 현재 지방조직 146단체 7,868명의 사원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형평사는 그 이후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1933년-1935년 사이에 지분사수는 161개에서 146개-98개로, 사원수는 8,293명에서 7,868명-6,540명으로 줄어들었다. 실제로 활동하는 사원이나 조직수는 이 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총본부는 지부를 재정리하고 지방순회 활동을 통하여 지역활동을 재건하려고 하였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누적되어 가는 부채의 상환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등장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창기의 인권해방이라는 목표도 퇴색하고 단지 백정계급의 경제적 이익단체로 변모함과 동시에 당시의 일제의 파쇼적인 정책과 맞물려, 일제에 영합하는 융화적인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1935년 4월의 제13회 전국대회에서는 형평사의 명칭을 大同社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대동사로 개칭한 이후에도, 간부들은 새로운 지도방침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또 사원들의 열의도 없어 형평운동은 쇠퇴일로의 상태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투쟁주의적인 운동방침을 日本主義的 협조적으로 전환한다”617)≪동아일보≫, 1936년 2월 7일.
조선총독부경무국, 앞의 책(1935), 167쪽.
고 선언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 후반에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민족주의 우파계열이 변절하여 친일 부역활동을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변절’이라고 하겠다. 한편, 1939년의 대동사 정기총회에서<대동사 해체문제>가 제안되어 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나 ‘종전대로 유지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있으나,618)≪동아일보≫, 1939년 4월 27일. 그 이후 대동사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619) 1940년 3월 대동사 간부들이 총독부를 방문하여 우육값 인상을 건의한 것이 마지막으로 신문에 보도된 것으로 그후의 활동 상황은 나타나지 않는다(≪조선일보≫, 1940년 3월 23일). 다만 1940년 이후에는 형평사의 중추였던 도부조합은 일제의 官制組合인 朝鮮畜産組合에 흡수되었으며, 일체의 정치·경제·사상운동은 금지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평사는 종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620) 1945년 해방후에는 朝鮮畜産組合은 韓國畜産企業組合으로 개칭되어 전국적인 산업단체로 되었다고 한다(金龍基, 앞의 글, 825∼826쪽).

<高淑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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