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 청년운동
  • 5) 고려공산청년회와 사회주의 청년운동
  • (3) 고려공산청년회의 청년운동 방침과 주요 활동

가. 민족문제 인식

 고려공청은 조선 청년운동의 투쟁목표는 일제의 타도와 봉건적 유제의 청산임을 주장했다. 고려공청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투쟁을 기본축으로 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중앙집권적인 민족혁명 청년조직을 결성하며,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고 근로대중을 민족혁명운동에 끌어들이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임무로 설정했다.

 고려공청은 조선의 독립은 러시아처럼 독립적으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혁명과 함께 할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조선의 혁명은 공산주의자만이 아니라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망라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그 강대한 응원대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고려공청은 1925년 4월 창립 당시 조선의 혁명에 대해 “제1계단으로 민족혁명을 하고 제2계단으로 노력군중해방운동”을 전개해야한다는 국제공청 동양부위원회의 방침을 수정하였다. 고려공청은 국내의 대중운동은 모두 무산계급운동이며 그 외에는 일부 ‘우경 민족주의자의 문화운동’이 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즉 국내에는 혁명적 민족주의자는 없으며, 민족주의자라면 타락한 문화운동자나 친일파를 가리키는 것이 현실이라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조선혁명은 노력군중이 주력대가 되어 혁명을 직접 이끌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해외의 혁명적 민족주의자 및 천도교와 같은 혁명적 종교단체와 협동전선을 공고히 하고 우경 문화운동자 또는 기타 일본 침략주의에 반항하는 모든 요소를 견제하고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공청의 이러한 입장은 당시 서울파와 북풍파·조선노동당파의 공산주의 청년세력에게서 “좌익소아병에 걸려 국내에 특별한 민족적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고려공청은 1926년에 들어와 약간의 변화된 인식을 보였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남북만주의 의열단과 신민부·통의부에 대해서는 민족혁명 전선에서 직접 투쟁을 하고 있는 세력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국내의 종교단체인 천도교와 대종교에 대해서도 민족적 혁명관념이 있는 세력으로 인정했다. 특히 權東鎭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구파와 민족혁명단체를 구성할 가능성이 예견되었으며, 조선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국민당’ 조직을 준비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민족혁명적 사고를 가진 자가 있을 수 있으나 단체로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공청은 1926년 5월로 예정되었던 제2차 대회의 의안으로 민족문제를 상정해 놓았다. 6·10만세운동은 바로 이러한 속에서 준비되고 실행된 것이었다.

 고려공청은 1926년 8월 고려공산청년동맹(서울파)과 합동하고 12월 5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청총의 강령을 수정하여 일반 민족주의 청년단체까지 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기 공청의 민족문제 인식은 기본적으로 조선공산당이 1926년 11월 正友會를 통해 ‘정치운동으로 방향전환’을 선언한 뒤 제2차 당대회에서 결의한 민족운동방침을 따랐다.

 조선공산당은 제2차 당대회에서 민족운동을 혁명적 민족운동과 민족적 정치운동으로 구분하였다. 혁명적 민족운동 세력, 즉 혁명적 독립운동 비밀결사와 연맹을 체결하고 만주에 의병을 조직하거나 기존의 단체를 원조함과 동시에 당원이 직접 가담하여 지도하도록 했다. 민족적 정치운동에 대해서는 합법공간에서 정치운동을 전개할 단일한 민족주의자의 정당(개인 가입, 지부제)을 만들고 프락치를 설치하기로 했다. 특히 과거 사상단체에서 활동하던 전위분자들을 ‘전국적 단일 표면적 정당’에 가입토록 하고 당의 직접 지도 아래 활동하도록 했다. 조공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대중에게 정치적 폭로와 정치적 교육을 행하여 민중을 이론적으로 지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1927년 10월 조선공산당 내 ML파에서 “신간회 내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 전취”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에 따라 고려공청도 ‘신간회 내 실제적 헤게모니 확보’를 자신의 이론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김규열·김영만 등의 서·상파는 12월 독립적으로 조공 제3차 대회를 열고 신간회 내 헤게모니 정책을 반대하였다. 이후 고려공청은 신간회 내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의 확대를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경북과 전남·전북 지역의 일부 공청기관들은 신간회 내 헤게모니 확보에 반대입장을 표명하면서 “후쿠모토이즘 직역파 배격”, “당간부파 타도” 등을 주장했다.

 한편 경성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청년들은 노동자·농민청년 및 무산계급 청년 이외의 계급청년과 정치적 제휴는 개별 사안에 따라 각 계급청년의 전위분자가 민족적 단일당과 공동투쟁을 통해서 행할 것을 주장했다.727)≪중외일보≫, 1928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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