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4) 6·10학생운동
  • (3) 6·10학생운동의 전개

(3) 6·10학생운동의 전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맞이했다. 돈화문 앞에서 홍릉까지 도열한 30만의 봉도인원중 학생(보통학교 6학년 이상으로 제한)만도 약 2만 4,000여 명이나 되었고 5,000명의 군대와 2,000명 이상의 정사복 경찰이 경계를 담당한 가운데 장례절차가 진행되었다.

 학생들의 항일만세시위는 오전 8시 30분경 대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떄 중앙고등보통학교학생 30∼40명이 이선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격문 1,000여 매를 살포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니 근처에 도열한 민중들도 이에 동조하여 함께 만세를 고창했다. 이와 같은 소란 속에 현장에서 학생 30∼40명이 일제군경에게 체포당하였으나 만세시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

오전 8시 45분 경:관수교 부근, 연희전문학교학생 50여 명이 독립만세고창과 격문살포, 보성전문학교생 동조, 일반민중 가세, 현장에서 주동학생 이병립·이천진·박하균 등 체포당함. 오전 9시 30분 경: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 YMCA생 박두종 외 2명이 독립만세와 격문 150매 살포. 오후 1시 경:훈련원 부근, 학생 1명이 독립만세와 격문살포. 오후 1시 30분 경:동대문 근처,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독립만세와 격문살포. 오후 2시 경:신설동 부근, 학생 1명이 독립만세와 격문 100매 살포. 오후 2시 20분 경:동묘 부근, 중앙고등보통학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 독립만세와 격문 700매 살포.820)≪東亞日報≫, 1926년 6월 11·12일.
≪朝鮮日報≫, 1964년 4월 26일,<6·10만세사건>.

 이와 같이 학생들이 계획한 항일독립만세시위는 실행되었다. 그러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던 일군경에 의하여 제지당하고 또 체포되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운동으로 일제 당국자들을 놀라게 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다시 한번 심어주었으며,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결의를 나타내었다.

 학생만세시위운동 중 민중을 크게 격동시킨 곳은 사범학교 앞인데,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자 그곳에 모여 있던 민중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당황한 일군경이 총탄을 난사하면서 진압에 나서고 학생과 군중이 한꺼번에 도피하는 바람에 사범학교 벽돌담이 무너지고 부근의 상점들이 파괴되었으며, 구경나왔던 일인 고관부인이 부상을 당하고 민중 속에서도 부상자가 나오는 등 불상사가 있었다.821) 중앙중고등학교, 阿部薰,≪朝鮮問題論集≫(1932), 388쪽.

 6·10학생운동으로 일경에게 검거된 수는 종로서에 150명, 동대문서에 50명, 본정서에 10여 명, 합계 210여 명이나 되었고, 전국 각 지방의 동요에 따라 1,000여 명의 학생이 체포당하였다. 이와 같이 체포된 학생 중에서 취조를 받은 학생이 106명이었고, 그 뒤 6월 12일에는 90명, 14일에는 47명만이 수감되었다.822)≪東亞日報≫, 1926년 6월 16일. 수감된 학생들을 학교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연희전문학교생(33명)
문과 3년:이권희·이은택·윤지련
문과 2년:김규봉·이금산·이광준·이병립·박안근·채우병
문과 1년:김세진·김영하·김윤근·박봉래·박영준·안태희·원종뢰·장홍식·홍명식
상과 2년:김근배·김낙기·김명진·김근·김대삼
상과 1년:김영소·장희창·이병철·안운정
학과학년미상:박락규·조대벽·최창일·김락식·김락기·김석영
중동학교:황정환·김재문·정대형·장길주·김인오·박선복
경성제대예과:이천진
신문배달부:외 1명
중앙기독청년학관:박두종 외 기타 4명
한편 중앙고등보통학교생들은 교사 趙喆鎬와 함께 21명이 취조를 받고 그 중 6명이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823)≪東亞日報≫, 1926년 6월 19일.
중앙중고등학교,≪중앙60년사≫, 133쪽. 취조 받은 학생들은 박용규·이동환·조홍제·김홍신·강연선·이규호·정수영·박객원·이홍영·김영환·정달영·김규정·계익선·이단종·안종운·박승태·박덕규·김장춘·정민환 등이었다.

 학생만세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일경은 수감중인 학생들을 석방하고 그 중에서 11명만 제령 제7호 및<출판법>위반으로 같은 달 25일 기소하였다. 구속 기소된 학생은 11명이었지만, 학생들에 대한 일제 당국의 처사는 가혹하였다. 총독부 학무당국은 7월 초 6·10학생운동으로 기소된 학생은 경성제국대학 입학불허방침을 발표하고, 각급 학교에 6·10학생운동에 관련된 학생에 대한 처벌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협성학교·중동학교에서는 각 7명, 중앙고등보통학교는 21명, 배재고등보통학교는 8명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러한 가혹한 처사는 당시 사회 각계각층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로써 일제당국에 대한 비난이 비등하였다.

 같은 해 11월 2일 기소된 11명에 대한 공판이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정되었다. 이때 재판장 강릉의 심문에서 학생들은 조금도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824)≪東亞日報≫, 1926년 11월 3일.

이병립: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는 말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하균:우리 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이천진: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선호: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했다.

유면희: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거하려 했다.

박용규:4,000매의 격문을 각 남녀고보에 배부하였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하였다.

곽대형: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포한 뒤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 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상의 진술과 같이 이들 젊은 학생들은 솔직담백한 태도와 기개로 잠재된 민족정신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제 검사는 이들 학생에게 무거운 형량을 구형하여 학업을 등지게 하였으니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탄압의 일면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들 11명의 명단과 형량은 다음<표 3>과 같다.825) 위와 같음.

성 명 연령 본적 학 교 학년 학생단체 가입 형 량
이선호 24 경북 중앙고등보통학교 4 조선학생과학연구회집행위원 징역2년
이병립 강원 연희전문학교문과 2 조선학생총연합회집행위원 징역3년
박두종 함북 YMCA 영어과     징역2년
박하균 25 함남 연희전문학교문과 2  
이천진 23 경성제국대학예과 1 조선학생과학연구회집행위원
유면희 경북 중앙고등보통학교 4   징역1년
박용규 22 중앙고등보통학교 5   징역2년
곽대형 20 전북 중동학교특과 2  
김재문 22 중동학교특과 3  
황정환 중동학교특과 3  
이동환 27 중앙고등보통학교 5  

<표 3>학생운동 관련자 형량

 이들에 대한 변호는 13명의 변호사가 맡았다. 이때 姜世馨 변호사는 학생들이 양심에 의하여 행동하였고 솔직한 대답과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감안하여 벌을 주는 것보다는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요지의 변론을 하였다.826)≪東亞日報≫, 1927년 3월 26일. 같은 해 11월 17일 언도공판에서 박하균만 징역 1년을 나머지 10명은 5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담당검사인 長屋은 이 판결이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공소를 제기, 1927년 3월 25일 2심공판이 개정되었다. 이때에도 학생들의 태도와 결의는 변화가 없었다. 즉 이병립은 “1년 또 1년이 되어도 초지는 결불변”이라 하였고, 박하균은 “양심의 소신대로 만세를 호창하였다” 하였으며, 박두종은 “오직 인산 당일의 목적은 조선독립을 완수하자는 데 있다”라고 하였고, 이선호는 “지금도 마음은 변치 않았다”고 대답하였으며, 유면희는 “그날을 어떻게 기념할까 하였다” 하였고, 박용규·김재문은 “지금도 조선독립을 열망한다”라 하였고, 곽대형은 “아직도 조선독립을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2심판결의 결과 형량은 무거워져 이선호·이병립·박두종·박하균·이천진·박용규·곽대형·김재문·황정환·이동환은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유면희만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았다.827)≪東亞日報≫, 1927년 3월 26일.

 6·10학생운동이 학생들의 뜻한 바와 같이 이루어지지 않자 제2의 6·10학생운동이 계획되었다. 즉 시내 6개 고등보통학교학생 대표 수십 명이 서대문 피어선성경학원에 모여 거사계획을 토의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격문을 인쇄하고 만세시위를 추진하다가 1926년 6월 16일 오후 2시 피어선학원생 劉載獻, 배재고등보통학교 3년생 金東鎭, YMCA 학원생 金東石 등 3명이 검거되고, 뒤를 이어 배재고보의 文昌模·孫盛華·廉弼柱·車鎭浩·金祚永·黃奎燮, 협성학교의 崔永植·孫秉錫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되도록 축소, 경미한 운동으로 취급하여 그 여파를 줄이는 방법을 취하여 같은 달 30일 기소유예처분으로 마무리지었다.828)≪東亞日報≫, 1926년 7월 1일.

 6·10학생운동은 3·1운동 때와 같이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서울에 국한되었으나 그래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적인 동요가 일어났다. 전라도의 고창·순창을 비롯하여 평안도의 정주·평양, 충청도의 홍성·공주 등지에서 동요가 있었고, 충청도 당진·홍성·강경,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하동, 함경도의 이원 등지의 학교에서는 동맹휴교로 일제와 대항하기도 하였다.829)≪東亞日報≫, 1926년 6월 12·13·14·16일. 특히 전북 고창에서는 고창고등보통학교생 50여 명이 봉도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 운동을 전개, 일제에 대항하였다.830)≪東亞日報≫, 1926년 6월 12일.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