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6. 학생운동
  • 5) 광주학생운동
  • (2)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2)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1929년의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동맹휴교는 학교 당국·도 학무과·경찰의 강경조치로 표면상으로는 종식되었지만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어 갔고 돌파구만 있으면 분출할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1928년을 보내고 1929년을 맞이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면서 학생들이 등교하자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5월부터 학생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여 벽이나 화장실 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혼을 고취하자”, “6월이 되면 全鮮的으로 맹휴하자”라는 낙서가 나붙었다.834) 鄭世鉉, 앞의 책, 1164쪽. 6월 26일에는 5학년 학생들이 자치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을 거부하였고, 전체 학생들이 동요를 일으켜 그 중 일부가 수업을 받지 않고 학교당국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하교하였다.

 더구나 이날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교 학생간의 첫 충돌을 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즉 이날 송정리의 한일통학생들의 열차가 광주와 송정리 중간역인 운암역을 지날 때 한국인 농부들이 개를 잡아 불에 그을리고 있는 광경을 본 광주중학생인 곤도시즈오(近蕂靜雄)가 “野蠻이다”라고 말했다. 옆에서 이를 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이 “무엇이 야만이냐” 하면서 그의 모자를 벗겨버렸다. 곤도가 모자를 벗긴 학생을 구타하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도 이에 곤도를 때려 패싸움으로 변했다.

 통학생들의 감정적인 대립은 민족적인 반목으로 발전하였다. 1929년 6월의 운암역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후인 10월 30일 또다시 한일기차통학생간의 시비가 발단되어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확대·발전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경 광주에서 통학생을 실은 하행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 통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출찰구로 나갈 때 광주중학 4년생 후꾸다슈조(福田修三)·스메요시 가쓰오(末吉克己)·다나까(田中) 등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인 朴己玉·李光春·이금자(이와시로 기누코:岩城錦子) 등을 ‘센징(鮮人)’이라 조롱하며 특히 후꾸다가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니 여학생들은 항거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 당시의 사정을 박기옥의 4촌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1년생이었던 朴準埰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835) 朴準埰,<光州學生運動>(≪新東亞≫, 1969년 9월호).

나는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는 한차로 통학을 하면서도 민족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며 지내온 터인데 그자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누님(4촌)이었으니 나의 분노는 더하였다.

나는 박기옥의 댕기를 잡고 장난을 친 후쿠다(福田)를 개찰구 밖 역전광장에서 불러 세우고 우선 점잖게 따졌다.

‘후꾸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그러자 후꾸다는 ‘뭐라고? 센징놈이 뭐라고 까불어’ 이 센징이란 말이 후꾸다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주먹은 그자의 면상에 날아가 작렬하였다. 더구나 센징이란 말이 얼마나 우리민족을 모욕하는 말인가? 일인교사들이나 지각없는 일인들 입에서 불시에 튀어나오던 이 비칭에 대하여 평소 나는 어린(16세) 마음에도 앙심을 먹고 있었다.

 박준채의 위와 같은 대일관은 당시 한국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태도였다. 박준채와 후꾸다의 싸움은 양교 통학생간의 패싸움으로 변하여 역전광장이 어수선하자, 나주역전 파출소에 근무하던 모리다 마쓰사부로(森田松三郞) 순사가 일방적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생이 나쁘다고 힐난하면서 박준채의 따귀를 때리고 이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박준채를 또 때리니 할 수 없이 한국학생들은 민족차별에서 오는 분노를 참고 귀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인 10월 31일 광주로 가는 상행통학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은 전날의 앙갚음으로 떼를 지어 박준채의 자리로 몰려와 시비를 걸자 한국인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박준채를 호위하면서 서로 옥신각신하였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5시 하행열차에서 한·일 학생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차장이 달려와 싸움을 말리고 박준채 외 수명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후쿠다의 통학승차권을 압수했고, 이 싸움을 보고 있던≪광주일보≫의 모 일본인 기자가 후쿠다의 말만 듣고 한국인 학생이 무조건 나쁘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일본인 승객들도 박준채를 향해서 “조선인주제에 건방지다”느니, “조선인학생이 잘못했다”느니 하면서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이를 들은 한국학생들은 대항도 하지 못하고 울분을 삼킨 채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11월 1일 박준채와 후쿠다 등은 전날 압수당한 통학승차권을 찾아 각기 학교에 등교하였다. 통학생간의 사이가 이처럼 험악하다는 것을 파악한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하세가와(長谷川) 교유가 통학생 감독을 위하여 이날 오후 광주역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통근열차의 발차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광주중학교 5년생 4∼5명이 광주고등보통학교생 鄭世勉에게 시비를 걸자 정세면은 기차에 타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한국인 학생들은 모두 기차에서 하차하여 개찰구를 경계선으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836) 朝鮮總督府 警務局,≪光州抗日學生事件資料≫(風媒社, 1979), 131쪽.

 광주역에서 벌어진 한일학생간의 새로운 사태를 접한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이케다(池田) 등 3명의 교유가 달려왔고, 광주중학교에서는 이다(伊田) 등 3명의 교유가 달려와 현장수습에 나섰다.

 현장에 달려온 중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은 일본학생편을 들면서 한국학생들을 나무라고, 전날 주먹을 휘두른 학생이 누구냐면서 오히려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려 하자,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이 “지금은 싸움을 말릴 때가 아니냐”하면서 동시철수를 제의하자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이 먼저 철수하고 뒤이어 한국인 학생들도 일단 학교로 철수하였다.837)≪朝鮮日報≫, 1929년 11월 5일.

 학교에 돌아온 한국학생들은 5학년 을급 급장 盧秉柱와 통학생단장 蔡奎鎬 등이 이날 사태를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려 했으나 분노에 복받친 학생들은 선후대책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일단 해산하기로 하고, 하세가와 교유의 인솔로 송정리 통학생이 귀가하고 기시모토(崇本) 교유의 인솔로 나주통학생도 모두 귀가하였다.

 드디어 일제하 한국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의 금자탑인 광주학생운동의 날은 밝았다. 이날은 일본 4대국경일의 하나인 明治節이었고, 공교롭게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 되어 우리민족에게는 開天節이어서 한국학생들에게는 희비가 교차되는 날이었으며, 마침 일요일인데다 전남 견산(繭産-누에고치) 600만석 돌파 축하회가 광주신사 앞에서 열리는 날이어서 온 광주시가 인파로 들끓었고, 일본학생들은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었으나 한국학생들은 비분 속에 이날을 맞이하였다.

 특히 이날은 광주시내 한국인 학생들에 의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성진회 창립 3주년 기념일이어서 독서회 중앙본부에서는 이날을 기하여 일제히 궐기하자는 암암리의 상호연락과 지시가 있어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들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하였다. 이런 눈치를 알아차린 각 학교의 교사들은 기념식을 마치고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불상사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오전에 학교에서 식을 마친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서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 나온 광주고등보통학교생 일동은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한일·학생간의 충돌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사에 몰려가 기사의 왜곡을 항의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신문제작을 방해했다.

 한편 任漢吉·高光信·具龍祐·黃南玉·崔祥鳦 등 7∼8명이 수기옥정 우체국 앞에서 광주중학교의 사이토(齊蕂俊夫) 등 16명과 맞부닥쳐 패싸움이 되었다. 이들 일본인 학생들은 신사참배 후 귀로에 광주천 부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생 崔雙鉉을 단도로 코와 안면을 찔러 부상을 입히고 도주해 온 자들이었다. 우체국 앞에서의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생들을 구타하니, 이들은 형세 불리함을 느끼고 광주역 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이들을 쫓아 광주역으로 달려가 순찰중이던 광주경찰서 순사 5명과 광주중학교 후꾸(福正) 교유를 제치고 플랫폼으로 도망친 일본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히니 이들은 두려워서 자기 학교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838) 梁東柱, 앞의 책, 108쪽.

 이럴 즈음 광주중학교생들이 구타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은 광주중학교에서는 기숙사생 백수십 명이 목도·단도 등을 휴대하고 유도교사의 인솔로 “광주고보생타도”를 외치면서 달려왔고, 광주고등보통학교 기숙사생들도 야구방망이나 운동기구 등으로 무장하고 광주역으로 달려왔으며, 시내를 배회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생과 광주농업학교생들도 역전으로 모여들었다.

 이리하여 광주역 광장은 한일학생간의 결투장으로 변하였다. 현장에 몰려있던 군중들도 한국학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왜놈 죽여라”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때 양측의 학생수는 각각 200여 명 내외로 수에 있어서는 비등하였으나 싸움은 한국학생들이 유리하여 일본인 학생들은 차츰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한일학생간의 충돌을 연락받고 광주서에서는 비상경계를 내리고 경찰대·기마대·소방대까지 동원, 현장에 출동하여 도주하는 일본인 학생들의 뒤를 쫓는 한국학생들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그리하여 양측 학생들은 담양가도 성저리 십자로 부근의 작은 토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에 경찰의 강력한 제지와 양교 교사들의 교섭으로 동시퇴각이 결정되어 일단 험악한 상태는 가라앉았다.839)≪朝鮮日報≫, 1929년 11월 5일.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들은 노병주의 인솔로 학교강당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많은 학생들의 손에는 장작 한 개씩을 들고 있었으니, 이것은 양측이 서로 대치해 있을 때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기 위하여 인근에 있던 관동여관의 장작더미에서 한 개씩 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강당에 집합한 학생들은 노병주의 사회로 사건경위의 보고와 사후대책을 논의, 일인중학교를 완전히 타도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지배적이어서 가두시위투쟁을 벌리기로 하였다.

 金明基·康潤錫·金容大·金相煥 등이 농구실을 부수고 삽·괭이·목봉 등과 검도실에서 검도도구를 꺼내어 장작을 들지 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광주농업학교의 崔泰柱가 광주농업학교생들도 가두시위에 참가한다고 통고해와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오후 1시 상급생들이 앞과 뒤에서 저학년생들을 보호하면서 교문을 박차고 시가로 쏟아져 나왔다. 이때에 광주농업학교생들이 뒤를 따랐고, 광주사범학교의 한국인 학생들도 학교의 완강한 제지를 뿌리치고 학교담을 뛰어넘어 시위대열에 합세했다.

 시내에 나온 시위대열의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응원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한국학생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전남 견산 600만 석 돌파 경축대회에 참석했던 수많은 도민들도 이에 호응하여 시위군중은 3만 명이라고 당시 언론기관이 보도하고 있다.840)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編, 앞의 책, 57쪽.
≪東亞日報≫, 1929년 12월 28일, 號外.

 시위대열은 두 번에 걸쳐 광주중학교를 목표로 돌진하였으나 일경의 강력한 제지에 부딪쳐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으나, 광주시내는 완전히 한국학생들로 메워져 일본인들은 겁에 질려 폐문 철시하였고, 광주서도 자체경찰력으로 부족하여 인근지방의 경찰을 동원하고 초비상상태에 돌입하였다.

 광주중학교 습격이 좌절되자 시위대열은 대오를 정비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로 돌아왔다. 교문 앞에서 광주농업학교와 사범학교생들은 해산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생들은 강당에 집결, ① 부상자문제, ② 금후의 연락방법들을 결의하고 대오를 지어 모두 귀가하였다. 이 시위로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는 물론 광주중학교까지 이날부터 3일간 휴교령이 내려졌고, 다시 사태가 악화되자 11월 9일까지 휴교령이 연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날부터 한국학생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다음날까지 70여 명이 구속되고 그 중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841)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編, 위의 책, 57쪽. 이와 같은 검거는 일경의 편파적인 행위였다. 한국학생 70명에 비해 일본학생은 7명을 검거했으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석방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 당국의 불공평한 처사에 민중들은 불만을 품었고, 언론기관·신간회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서도 이를 규탄하고 비밀리에 조사단을 파견, 진상조사에 나섰다. 그 중 신간회는 許憲·金炳魯·黃尙奎 등이 11월 9일 광주에 도착, 광주고보교장과 광주중학교장을 만나서 사건진상을 조사하고 관계기관을 방문하여 사건의 불공평한 처리를 엄중 항의하였다.842) 광주학생들에 의한 항일투쟁의 진상조사를 위하여 서울에서는 신간회·조선학생과학연구회·조선학생회·중앙청년동맹 등에서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보냈으며≪東亞日報≫·≪朝鮮日報≫등도 특파원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수피아여학교·광주숭일학교 등의 한국학생들은 편파적인 행정기관의 처사에 격분하고 끝까지 항쟁할 것을 결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제1차 시위운동 직후인 11월 4·5일 경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 장재성은 재광주사회단체의 간부인 張錫天·姜錫元·朴五鳳 등과 회합하여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여 각 학교의 책임자를 정하고 다음과 같은 격문의 초안을 작성, 학생들에게 보냈다.

학생이여 대중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의 손으로 탈환하자. 언론·결사·집회·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식민지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大邱覆審法院 刑事部,<昭和 5년 刑控 제176·177호>).

 이리하여 10일 광주고등보통학교생 吳快一·李榮範, 광주사범학교생 李信珩·황상남, 광주농업학교생 金南哲·鄭昱 등이 회합하여 11일 각 학교별로 수업시작종을 신호로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11일보다 12일이 마침 광주장날이라 이날 많은 군중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시위일을 12일로 수정하고 오쾌일이 다음과 같은 4종의 격문인쇄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①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우리의 슬로건 아래로! 피검자를 우리의 힘으로 탈환하자. 검속자를 즉시 석방하라. 교내의 경찰권 침입에 반대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②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피검자를 탈환하라. 재향군인의 비상소집에 반대하라. 경계망을 즉시 철회하라. 소방대·청년단을 즉시 해산하라.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③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달려 있다(이하 제목은 2항과 같음).

④ 용감한 학생·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여 힘차게 싸워라(이하 제목은 1항과 같음).

 (大邱覆審法院 刑事部,<昭和 5년 刑控 제176·177호>).

 이와 같은 격문을 약 1,000매 인쇄하여 12일 오전 8시 金安鎭에게 약 500매, 姜旻燮에게 약 200매, 조길용에게 약 300매를 교부하였다.

 11월 12일 수업종이 울리자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김향남이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를 구하라”는 외침과 함께 김안진·최양을·김삼석·김동섭·송만수·김홍남 등을 선두로 학생일동이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시위대열은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를 목표로 정하고 진격하였다. 도중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시위에 합세하라고 외쳤으나 양교의 교사들이 교문을 굳게 잠그고 극력 제지하였으므로 시위대열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농업학교에는 수업종을 신호로 조길용의 제창과 김남철·최정기 등 10여 명의 선도로 전교생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형무소로 진격하였으나 광주고등보통학교 부근에서 급히 출동한 일경에 의하여 저지 당하였다.843) 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編, 앞의 책, 58쪽.
양동주, 앞의 책, 119∼200쪽.

 이상과 같은 제2차 항일학생시위운동으로 일경에 검거된 학생수는 양교를 합하여 280명이었으니 시위참가학생 약 550여 명의 과반수가 되며 일경은 이 많은 학생을 유치장으로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도청 앞 무덕전에 집단으로 학생을 수용하였다. 특히 제2차 시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광주시내 일반 사회단체에 대하여도 검거선풍이 불어 사회단체간부 100여 명이 차례로 구속되었다.844)≪東亞日報≫, 1929년 12월 28일, 號外.

 이와 같은 제2차 광주학생시위운동이 있은 후, 일제는 광주시내 중등교육기관에 휴교조치를 내리고 시위운동에 관한 일체의<보도금지령>을 단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 해 12월 28일까지 취해져 그 사이 한국민족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파악하지도 못하였고, 이에 따라 전국의 민심은 동요되고 일제의 악랄한 정책에 대한 분노는 커져갔다.

 2차에 걸친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으로 정식 구속된 학생은 255명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들은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930년 1월 9일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다시 백지동맹을 일으켜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했고, 16일에는 제3차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48명이 무더기로 퇴학당하였으며,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도 백지동맹·비밀결사 등 시위에 관련된 학생 40여 명이 퇴학을 당하였다.845)≪朝鮮日報≫, 1930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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