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1. 병참기지화정책
  • 2) ‘병참기지화’ 정책의 특징
  • (1) 군수산업으로의 자원 집중

(1) 군수산업으로의 자원 집중

일제 말기의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 후일 “일본은 한발한발 임전태세로 끌려 들어가 점차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주입해야 했다. 그 후 나타난 시정상의 흠이 이 사이에 일본이 범한 오류였음을 솔직히 인정”할005)水田直昌 監修,≪總督府時代の財政≫(友邦協會, 1974), 8∼9쪽. 정도로 극심한 수탈과 강제력을 띤 자금·물자·노동력의 집중과 동원정책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첫째, 자금통제를 위해 1937년 10월부터 조선에 적용된<임시자금조정법>(1937. 10)은 각종 산업을 생산력 확충, 국제수지, 생산능력 등의 기준에 따라 3종(갑·을·병)으로 나누어 자금공급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군수공업 이외의 부문에 대해서는 자금조달을 규제했다. 또 각 금융기관은 기업에 자금을 대부하거나 유가증권의 응모·인수 또는 모집을 할 때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은행등자금운용령>(1940. 12)은 사업설비 자금만 통제대상으로 설정한<임시자금조정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운전자금까지 통제대상으로 설정하여 철강·석탄·경금속·비철금속·석유 및 그 대용품 등 군수 및 관련 산업에 대한 자금집중을 더욱 높였다.006)裵永穆,≪植民地 朝鮮의 通貨金融에 관한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0), 293∼301쪽.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세증징·강제저축·조선은행권 증발 등 재정금융기구를 이용한 민간자금 흡수책이 동원되었다. 거듭된 조세증징을 통해 거둔 자금은 직접적인 전비에서부터 전쟁관련 사업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목으로 지출되었다. 특히 1936∼1945년간에 일본의<임시군사비특별회계>로 전출된 금액은 16억여 엔(1945년분 예정액 포함)이나 되었고 여기에 징병제실시 준비비 등 관련지출을 합한 17억여 엔은 조세의 62%나 차지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는 1941년을 경계로 급증한 전비유출액은 1941∼1945년간에 총유출액의 93%가 집중되어 조세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73%나 되었고 말기에 이르면 조세의 대부분을 군사비로 전용하고도 모자랄 정도였다.007)정태헌,<식민지재정기구를 통한 세출의 용도와 성격>(≪일본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한길사, 1996), 101∼105쪽.

1936년부터 시행된 강제저축은 직접적 박탈감을 반감시킨다는 점에서 조세보다 효율적인 수탈방식으로서 일제도 ‘무리’라고 인정할 만큼 ‘폭력을 띤 수탈’이었다.008)水田直昌·土屋喬雄 編述,<朝鮮産業の資金形成(第6話)>(≪財政金融政策から見た朝鮮統治とその終局≫, 朝鮮史料編纂會, 1962), 104·111쪽. 저축목표액은 1938년 2억 엔에서 1944년에 23억 엔으로 급증했는데 실적액은 이보다 훨씬 높았고 “1944년 10월까지 극히 순조로운 추세”로009)近藤釰一,≪太平洋戰下の朝鮮≫5(朝鮮史料編纂會, 1964), 101쪽. 전개되어 추정치에 따른다면 같은 기간 조세액의 3배 이상이나 되는 천문학적 규모였다. 이렇게 동원한 자금은 일본경제 또는 전쟁수행을 위해 일본국공채의 매입, 전쟁관련 업종의 대출자금으로 유용되었다. 특히 각 금융기관과 민간의 구매액이 100억 엔 이상이나 되었던 일본국공채010)<對日通貨補償要求의 貫徹>(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Ⅰ, 1948), 335쪽.는 해방 후 경제건설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상환받아야 할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결국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일제 말기의 조선은행권 증발은 통제가격체제하에서 물가상승이 억제된 가운데 일본국채를 발권 준비로 이용하여 체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세나 강제저축 등 직접적인 자금수탈보다 훨씬 대규모적이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운용된 수탈방식이었다. 조선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매입된 국채를 보증준비로 한 조선은행권 발행은 1941년부터 일본 대장대신이 고시하는 최고발행제로 바뀌었고 특히 1944년 이후 패전 때까지는 국채보증이 발행준비의 거의 모두를 차지할 정도로 남발되었다. 실제로 조선은행권은 1936년 말(2억 1,000만여 엔) 기준으로 9년도 안 지난 1945년 8월 14일(48억 3,900만여 엔)까지 무려 23배나 증발되었다.011)朝鮮銀行史硏究會 編,≪朝鮮銀行史≫(東洋經濟新報社, 1987), 736·847쪽. 일본국채는 일본은행권으로 매입했기 때문에 국채매입량 만큼 일본은행권 통화량을 줄여 일본에서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반면 조선의 인플레이션은 그 이상으로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인위적인 물가억제조치에도 불구하고 생필품의 실거래가격은 수십 배나 뛰었고 암시장 거래가격과 통제가격의 차이도 일본의 2∼3배보다 훨씬 높은 6∼10배나 되었다.012)정태헌,≪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역사비평사, 1996), 422∼425쪽.

둘째, 물자통제를 위해 생산·유통·소비를 통제하는 배급체제가 작동되었다. 생필품을 비롯한 물자난으로 내핍이 강요되면서 물자수급의 초점을 군수 조달에 둔 통제경제체제가 가동된 것이다. 군수품 생산에 소요되는 원자재의 해외의존도가 높았던 일본은 국제수지 악화에 대한 대책으로 1937년 10월부터<수출입품등임시조치법>(1937. 9)을 조선에도 적용하여 전 산업부문에 걸쳐 거의 모든 물품에 대해 군수생산과 관련이 없는 물자는 물론, 필수원료의 수입까지 제한했다. 그리고 물자부족에서 당연히 발생하게 마련인 물가상승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가 수반되었다. 먼저<조선물품 판매가격 취체규칙>(1938. 10)에 따라 시장가격 체제를 부정하고 물가위원회 지정가격에 의한 상품거래를 강요했다. 또<가격 등 통제령>(1939. 10)을 제정하여 주요 산업물자의 거래를 시행기준일을 따라 ‘9·18 정지가격’이라고 불리운 ‘공정가격’에 맞추고 경제경찰에게 암거래의 단속과 처벌권을 부여하면서 통제체제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법령은 오히려 암거래 가격의 상승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서민생활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전쟁의 확대로 군수물자 생산 장려와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소비를 억제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생활필수물자통제령>(1941. 4)과<물자통제령>(1941. 12)이 공포되었다.<물자통제령>은 철강재·전력·식량·목재·생사·금·은을 비롯한 광산물·신탄·의약품과 위생자재·축산물·채소와 과일 등 전쟁물자에서부터 생활필수품에 이르는 물자 전반에 걸쳐 적용되었다. 또 물자의 생산과 가공·수리 등의 제한·금지, 판매 및 양도를 총독이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생활필수품을 포함한 배급제도를 전면적으로 확대 실시하게 되었다.013)허영란,<전시체제기(1937∼1945) 생활필수품 통제 연구>(≪國史館論叢≫88, 2000), 292∼293쪽. 그리고 쌀을 비롯한 각종 식량에서부터 축산물·임산물·수산물·섬유품·금속품·철기품 등 거의 모든 물자는 공출대상으로 규정되었다.014)조선총독부가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하여 수탈한 물자의 규모는 정확하게 집계되어 있지 않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9월 1일까지의 조사에 근거하여 외무부 정무국이 간행한≪對日賠償請求調書≫에 따르면 1937년 이후 물적 피해와 강제 공출에 의한 손해액을 131억여 엔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빠진 품목이 많아 실제 피해액은 이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추정된다. 일단 공출량이 할당되면 생산 여부에 상관없이 암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라도 구입해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 부담은 생존을 위협할 정도였다. 또 산업통제와 물자배급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군수공업 하청기관으로서 원료배급기구인 공업조합중앙회 통제 아래 분산된 중소공업을 묶어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것이<조선공업조합령>(1938. 9)이었다.015)裵城浚,≪日帝下 京城지역 工業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8), 151쪽. 전황이 나빠지는 1942년에는<기업정비령>(1942. 6)을 제정하여 군수관련 기업도 ‘비능률적’인 경우 정리대상에 포함시켜 정선된 군수산업에만 설비와 자금을 집중 투여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전시물자 통제는 일정한 마무리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셋째, 군수공업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은 1938년부터<국가총동원법>(1938. 5)을 조선에 적용하면서 본격적으로 강행되었다. 숙련공과 기술자를 군수공업에 집중시키기 위해 제정된<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1938. 9)은 경성고등공업학교 등 3개교의 기계·전기·채광·야금·요업·조선·항공 등 12개학과의 수료자를 고용할 경우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또<공장사업소기능자양성령>(1939. 6)은 노동자 200명 이상을 고용하는 공장은 노동자 수의 6%를 숙련공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강제규정까지 설정했다. 나아가 조선총독부는 노동력의 ‘적정배치’를 직접 관장하기 위해 직업소개·노동력공급·노동자모집 등의 사업을 허가제로 규정한<조선직업소개소령>(1940. 1)을 공포했고 이를 위해 경성·부산·평양 등지에 있는 각 府營 직업소개소를 국영으로 이관하고 1941년까지 대전·광주·청진 등지에 추가로 국영직업소개소를 설치하여 노동력 공급에 주력했다. 1941년에는<노무조정령>을 공포하여 비군사 부문의 노동자 고용을 제한하고 군사부문에 고용된 노동자 이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1943년에는 각 공장·광산마다 군대조직과 유사한 ‘仕奉隊’를 조직하여 군대식으로 노동자를 통제했고 1944년 2월에는<국민징용령>을 실시함으로써 징용을 ‘황국신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여성을 포함한 전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정책이 시행되었다.016)郭健弘,≪日帝下 朝鮮의 戰時 勞動政策 硏究≫(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9), 111∼116·130∼132·144쪽. 1944년 9월에는 모집·알선을 통한 동원방식을 없애고 총독부 강권에 의한 징용으로 통일시켜 강제동원 방식으로 일원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원된 규모는 정확한 실상은 현재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략 조선 내 동원 42만 명, 일본·사할린·남양군도 등으로의 동원 150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에는 강제동원의 가장 극악한 형태인 ‘종군위안부’, 즉 ‘성노예’로 동원된 수만 명의 젊은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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