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1. 병참기지화정책
  • 2) ‘병참기지화’ 정책의 특징
  • (2) 생산성 감퇴를 수반한 ‘산업고도화’의 실상

(2) 생산성 감퇴를 수반한 ‘산업고도화’의 실상

일제가 도발한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수물자 보급지로 규정된 조선 경제는 군수부문의 급성장으로 경공업(식료품공업·방직공업), 중화학공업(화학공업·금속공업·기계기구공업)으로 나눈 공장생산의 업종별 구성의 추이에서 이전과 달리 ‘고도화’ 현상을 보였다. 즉<표 1>에서 각년별로 양자의 비중을 보면 1931년(65.8%:18.3%), 1937년(53.4%:33.4%), 1939년(44.2%:43.6%), 1942년(38.7%:46.9%)에 이르는 동안 1930년대 전반기까지의 경공업 절대 우위에서 1939년을 경계로 중화학공업 우위로 반전되었다. 1930년대 이후 공장(5인 이상 고용)의 생산액(이하 공산액)은 ‘조선공업화’ 정책 시행기간인 1931∼1936년간(2.62배)은 물론 ‘병참기지화’ 정책 시행기간인 1936∼1942년간(2.59배)에도 급증 추이를 보였다. [공산액/농산액] 비율도 1931년(39.1%) 이후 계속 급증하여 1936년(59.6%)에는 절반을 넘었고 1940년(80.1%)과 1941년(89.7%)에는 근접한 수준으로 좁혀졌다.

물론 이 시기의 공업화는 몇 가지 점에서 뚜렷한 한계가 수반된 것이었다. 첫째 1939년에도 가내공업(4인 이하 고용) 생산액이 공산액의 22%를 차지하여017)≪朝鮮經濟統計要覽≫(1949), 71쪽. 이 비율은 1935년(35%)에 비해 크게 축소된 것이었다. 시장장악력이 제한적이었다. 둘째 공산액은 급증했지만 적어도 1941년까지 농산액에 미치지 못했고 공산품 원료로 쓰인 농산액까지 공산액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비중은 더 떨어진다. 또 이 시기 경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물가를 감안하면 공산액의 실제증가율은 명목증가율 보다 크게 떨어진 것이었다. 예를 들어 통제경제 초기인 1936∼1939년간의 공산액 증가율(2.03배)은 실제보다 낮게 잡힌 물가상승율(1.64배)에 따르더라도 실질 증가율(1.24배)과 큰 차이를 보였다. 셋째 공산액은 1943년 이후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해지고 연합국의 봉쇄정책이 강화되자 수송이 두절되어 원활한 원자재 공급에 제동이 걸리면서 절대액 자체가 감소 추이로 반전되었다. 생산성, 즉 노동생산성과 공장의 평균생산액도 1940년대 들어 격감 추이를 보였다.

연도 공장수
(F)
고용 노동자수 공장생산액(만엔)과 주요업종별
비중(%)
평균생산액
(엔)
전 년 비
증가율(%)
총인원
(N)
기술자
(S)
S/N
(%)
총 액
(P)
방직 금속 기계
기구
화학 식료
공장
(P/F)
노동자
(P/N)
P P/F P/N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4,613
4,643
4,838
5,126
5,635
5,927
6,298
6,624
6,953
7,142
10,889
12,669
13,293
 
106,781
110,650
120,320
138,809
168,771
188,250
207,002
230,996
270,439
294,971
301,752
331,181
362,953
 
3,262
3,340
3,568
4,171
4,871
5,051
5,592
7,152
8,250
10,406



6,129
3.1
3.0
3.0
3.0
2.9
2.7
2.7
3.1
3.1
3.5



 
27,515.1
32,327.1
38,482.2
48,652.2
64,398.7
72,031.9
96,736.5
116,711.5
145,983.2
164,504.7
172,222.5
186,391.2
205,000.0
200,000.0
8.9
9.5
10.1
10.2
11.1
12.5
12.7
13.4
13.2
14.0

16.8
16.8
 
5.9
6.7
7.6
8.5
3.3
3.9
4.7
7.4
9.0
8.8

11.1
14.6
 
0.8
0.7
0.8
1.0
1.0
1.0
1.1
1.8
3.2
4.2

5.7
5.6
 
11.6
10.9
13.5
14.0
18.3
22.6
27.6
27.2
31.4
39.4

30.1
29.3
 
56.9
59.4
52.3
53.3
50.6
44.5
40.7
38.4
31.0
18.5

21.9
19.5
 
59,647
69,625
79,542
94,913
114,283
121,532
153,599
176,195
209,957
230,334
158,162
147,124
154,217
 
2,577
2,922
3,198
3,505
3,816
3,826
4,673
5,053
5,398
5,577
5,707
5,628
5,648
 

17.5
19.0
26.4
32.4
11.9
34.3
20.6
25.1
12.7
4.7
8.2

 

16.7
14.2
19.3
20.4
6.3
26.4
14.7
19.2
9.7
-31.3
-7.0

 

13.4
9.5
9.6
8.9
0.3
22.1
8.1
6.8
3.3
2.3
-1.4

 
기간별 증가율 (배)
1931
∼36
1.29 1.76 1.55   2.62 3.70 1.76 3.21 5.09 2.05 2.04 1.49      
1936
∼42
2.14 1.76     2.59 3.47 7.32 14.32 3.46 1.27 1.21 1.47      
1942
∼43
1.05 1.10                          

<표 1>1930년대 이후 공장(5인 이상 고용) 및 생산액 추이

*≪朝鮮經濟年報≫Ⅰ(1948), 100쪽;≪朝鮮總督府統計年報≫(1940), 112∼119쪽. 1941년 이후는≪朝鮮經濟統計要覽≫(1949), 69∼70쪽.
비고:1943년, 1944년 생산액은 예정치임. 1944년의 기술자 수는 토목건축 부문(2,347명)을 뺀 인원임.

<표 1>에서 공산액 추이를 보면 예정치인 1944년부터 감소경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1943년의 추정치를 15억여 엔으로 집계한 다른 자료018)大藏省管理局,≪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第6分冊, 19∼20쪽.가 전후에 발표되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면, 공산액은 1943년부터 심각한 상태에 빠져 1942∼1943년간에 극심한 감소율(-19.5%)을 보였다. 즉 공장 생산은 1939년까지 비교적 순조롭게 증가했지만, 이미 1940년부터 자재난에 봉착하여 조업이 연기되거나 예정된 사업 착수가 중지되는 경우가 많아019)川合彰武,≪朝鮮工業の現段階≫(東洋經濟新報社, 1943), 229∼230쪽. 일제가 독려하는 의도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940년대에는 모든 가용자원을 군수생산에 집중하고 통제 강도를 높였지만 공산액 증가율이 둔화되었고 1943년 경부터 절대액 자체가 감소했다. 1938년에<국가총동원법>과 더불어 시행된 물자동원계획이 1940년부터 중점주의 생산방침으로, 생산력확충계획이 설비확장보다 기존설비를 최대한 활용한 단기적 생산량 극대화방침으로 바뀐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와중에서 일제는 1941년 말 미국과의 전쟁까지 도발한 것이다. 전쟁 도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2년 미드웨이해전의 대패 이후 선박 상실이 급증함에 따라 수송력이 두절됨으로써 물자난과 생산력 감소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각년별 공산액 증가율도 1940년 경부터 격감했는데 1936∼1937년간(34.3%)부터 1938∼1939년간(25.1%)까지는 대단히 높았지만, 1939∼1940년간(12.7%)에 격감한 이후 1940∼1941년간(4.7%), 1941∼1942년간(8.2%)에는 현격하게 떨어졌다. 1940∼1942년간에도 물가상승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률에 가까웠고 이후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공산액은 대체로 1940년 경부터 실질적으로 또는 절대액 면에서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져들었다. 다만 1931∼1936년간의 증가율(2.62배)에 비해 기간이 짧은 3년간인 1936∼1939년간의 증가율(2.03배)이 비교적 높았던 것은 만주침략 이후 신설되기 시작한 공장들이 1937년 경부터 조업에 착수된 경우가 많았고 중국침략 이후 건설된 공장들도 시국의 중대함에 비추어 바로 조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생산액 감소는 생산성의 격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936∼1942년간에〔공장수(2.14배)<생산액(2.59배)〕증가율 관계를 보였지만 단위공장의 생산성, 즉 공장의 평균생산액 증가율(1.21배)은 이전 시기보다 크게 둔화되었다. 각년별 증가율 추이를 보면 1936∼1937년간(26.4%) 이후 떨어져 1939∼1940년간(9.7%)에 격감한 이후 마이너스로 반전되었는데 1940∼1941년간(-31.3%)의 감소율이 특히 컸고 1941∼1942년간(-7.0%)의 감소율도 적지 않았다.

노동자수는 1931∼1936년간(1.76배)에 이어 1936∼1943년간(1.93배)에도 급증했지만 노동생산성, 즉 노동자의 평균생산액은 1940년대에 격감 추이를 보였다. 노동생산성의 각년별 증가율을 보면, 1936∼1937년간(22.1%)을 정점으로 1937∼1938년간(9.1%)에 격감한 후 1940∼1941년간(2.3%)까지 매년 떨어졌으며 1941∼1942년간(-1.4%)에 마이너스로 반전되었다.

회사의 납입자본 증가 추이는 1931∼1936년간(2.01배)에 비해 1936∼1941년간(2.34배)에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1934∼1935년간(37.0%)부터 1938∼1939년간(37.3%)까지, 즉 중국침략을 전후한 시기에 급증했을 뿐 일제가 자금동원에 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40∼1941년간(5.4%)에는 격감했다. 자본생산성(공산액/납입자본금 비율)의 각년별 추이를 보면 투자의 효율성도 크게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납입자본이 급증하는 1934∼1935년간(-3.4%)과 1935∼1936년간(-8.6%)의 마이너스 성장률은 투자와 공장가동의 시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1938∼1939년간(-8.9%) 이후에도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전시체제에 따른 생산독려 속에서도 생산량이 조선경제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동원한 투자액을 따르지 못하여 투자효율은 현저하게 격감하고 있었다.020)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연 도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기간별
증가율(배)
1931
∼36
1936
∼41
납입자본금(만엔) 35,923 37,525 39,324 43,151 59,128 72,326 93,467 102,814 141,159 160,372 168,954 2.01 2.34
전년비증가율(%)   4.5 4.8 9.7 37.0 22.3 29.2 10.0 37.3 13.6 5.4    
자본생산성 0.77 0.86 0.98 1.13 1.09 1.00 1.04 1.14 1.03 1.03 1.02 1.30 1.02
전년비증가율(%)   12.5 13.6 15.2 -3.4 -8.6 3.9 9.7 -8.9 -0.8 -0.6    

(<표 1>,≪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년판).
*공산액에는 회사가 아닌 소공장 생산액도 포함되지만 추이 파악에 무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각 부문의 생산성이 격감하는 와중에서 공장수가 1940년대에도 계속 늘어났다는 것은 사실상 휴폐업 된 경우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공장가동률이 크게 떨어지고 있던 당시의 현실을 반증한다. 한편 1943년의 공산액 추정치를 15억여 엔으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42∼1943년간에 공장생산성(-23.3%)과 노동생산성(-26.6%)이 격감했고 이러한 추이는 일제가 패전할 때까지 더욱 심해져 갔다.

공산액의 업종별 추이와 특징을 살펴보자. 이전까지 가장 비중이 컸던 식료품공업은 1931∼1932년간(56.9∼59.4%)에만 늘어났을 뿐 이후 다른 업종의 급증으로 계속 감소하다가 1939년에 화학공업에 수위를 내주었고 특히 1940년(18.5%)에 격감하여 1936∼1942년간의 증가율(1.27배)도 가장 낮았다. 비료 및 군수원료의 생산이 급증하여 화학공업은 1931∼1936년간(5.09배, 11.6∼22.6%)에 급증했고 1939년(31.4%)에 최다비중을 차지한 이후 1940년(39.4%)에는 압도적인 업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기초부문인 산·알칼리공업은 물론 유기화학공업 부문이 거의 없이 약품 및 염료 공업의 대부분을 일본에 의존했다. 방직공업은 1931년(8.9%), 1937년(12.7%), 1942년(16.8%)에 이르는 동안 계속 확대되어 1936∼1942년간 증가율(3.47배)도 대단히 높았다. 특히 면방직공업은 ‘일본권’과의 종속적 분업연관 속에서 중국침략 이후 늘어난 군수요를 충족시키고, 일본이 군수공업에 치중하면서 발생한 필수품 공급의 부족을 보완하는 역할 때문에 크게 성장했다. 이 기간 면방직업의 경영주체는 경성방직 외에는 대부분 일본자본이었는데 면방직업도 1940년대 이후에는 목화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정체 또는 축소되는 처지에 놓였다.

금속공업은 1931∼1936년간(5.9∼3.9%)의 완만한 감소 추이에서 1937년(4.7%) 이후 늘어나 1942년(11.1%)과 추정치인 1943년(14.6%)에 급증했는데 1936∼1942년간의 증가율(7.32배)도 대단히 높았다. 기계기구공업은 1936∼1942년간(14.3배, 1.0∼5.7%)에 증가율이 가장 높았지만 비중이 작았고 2∼3개 대공장을 제외하면 소규모 수준이었다. 금속·기계기구공업의 비중은 1938년(9.2%)에 비해 1942년(16.8%)에 늘어났지만, 일본의 경우 1938년(41%)에 이미 절대적 비중을 점했고 1940년대에 70%로021)川合彰武, 앞의 책, 309쪽. 급증한 것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일본권’의 종속적 고리로 규정된 가운데 선철이나 鋼 등 군수용 광물의 이출과 공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금속·기계기구공업의 제한적 성장도 생산수단의 생산보다 수리·조립 수준에 머물러 일본으로부터 중공업제품 수입의 급증을 수반했다. 1940년에도 기계기구 자급률은 제조가공용 기계 19.6%, 차량·선박·자동차 및 부속품 등 수송수단에서 29.5%를 차지했을 뿐 나머지는 4∼7%의 낮은 수준이었고 공작기계나 철도기관차의 경우는 전무했다.022)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Ⅰ(1948),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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