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1. 병참기지화정책
  • 2) ‘병참기지화’ 정책의 특징
  • (3) 군수원료로서 광물의 생산 및 이출 급증

(3) 군수원료로서 광물의 생산 및 이출 급증

‘병참기지화’ 정책의 큰 특징은 ‘鑛業化政策’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광산 개발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표 2>를 보면 1937년 이후의 광산액(41억 2,700만여 엔)은 식민지 전기간 광산액(48억 9,300만여 엔)의 84%가 집중되었다. 특히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차량이나 항공기 등 군수품 생산원료로서, 그리고 무역결제대금 확보를 위해 ‘지상명령’으로 채굴된 원광석이 그대로 일본으로 이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의 광업은 군수공업, 대일 이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해방 후 미군정이 억제정책을 펴는 배경이 되었고 시장도 사라져 광산 가동이 대부분 정지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1936∼1942년간에 광산액 증가율(4.3배)은 공산액 증가율(2.6배)보다 훨씬 높았으며 [광산액/공산액] 비율도 1931년 7.0%에 불과했던 것이 1930년대 후반에 15% 내외로 급증했고 1940년대 초에 20%를 훨씬 넘었으며 추정치이지만 1943년과 1944년에는 50%가 넘을 정도로 광산액이 급증했다. 광산경영도 점차 일본자본이 장악해 가는 추이를 보였다. 1937∼1944년간에 조선인 광산의 생산량 비중은 금의 경우 25%∼10%로 격감했고 동(20%)·아연(5%)·납(10%)의 경우는 변동이 없었지만 나머지 鑛種에서는 형석·흑연 등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 광산에서 생산되었다. 조선인 광구의 비중은 1931년 26%, 1937년 47%, 1945년 31%로 적지 않았지만 영세규모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7∼1945년간에 조선인 광구 비중의 감소와 대조적으로 일본인 광구는 1.84배나 급증했다.023)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Ⅰ(1948), 86쪽.

‘병참기지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제가 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것은 무엇보다 일본 내에서 생산되는 중요광물의 종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조선중요광물증산령>(1938. 5) 공포 당시 총독부의 穗積 식산국장은 철·텅스텐·수연·흑연·운모·마그네사이트 등의 광물은 전적으로 조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실제로 1944년 ‘일본권’ 안에서 생산된 광산물 중 조선산 비중이 50% 이상을 점하는 광물은 형석·흑연·텅스텐 등 9가지였고 보통선철·알루미늄·아연·철광석·석면·운모·철광석 등은 10% 이상을 차지했다. 중요하고 시급하게 증산해야 할 중요광물은 금·은·동·납·수은·아연·철·텅스텐·니켈·코발트·흑연·석탄·마그네사이트·사금 및 사철 등 25종이었고 조선에서는 이 가운데 금·철강·석탄·경금속(알루미늄·마그네슘), 비철금속(동·납·아연) 등 생산력확충 15품목을 생산하도록 규정되었다. 광업을 군수공업에 종속시킨<조선중요광물증산령>은 ‘국방상 특히 중요’한 광물 증산을 위해 장려금을 교부하거나 광업자에게 사업설비의 신설·확장·개량 또는 광업권 양도를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024)全國經濟調査機關聯合會朝鮮支部 編,≪朝鮮經濟年報≫(1939), 198∼199쪽·(1940), 215∼216쪽. 025)일제 말기의 통계는 불확실한 경우가 많다. 이 표에서는 1943년과 1944년의 광산액이 급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1942년 이후 가동광구수와 허가광업자가 격감하는 상황에서(<표 3>)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물론 같은 자료의 다른 통계(Ⅲ-19쪽)를 보면 광업종사자가 1943∼1944년간에 51만 4,000여 명∼323만여 명으로 급증하여 호당 가족 수를 감안할 때 1944년의 광산노동자가 65∼70만여 명이나 되어 광산액 급증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통계(Ⅰ-84쪽)에서의 1944년 광산액(4억 3,400만여 엔)은 이 표(11억여 엔)와 큰 차이가 있다. 이 표에서는 자료의 일관성을 위해 그대로 게재한다.

연도 광산액
(T)
이출액
(E)
E/T
(%)
연 도 광 산 액(T) 이 출 액(E) E/T
(%)
1910
1914
1916
1918
1920
1926
1929
1930
1931
1936
607
852
1,417
3,083
2,414
2,437
2,648
2,468
1,932
10,310
72
149
623
2,648
1,627
1,249
1,923
1,561
1,293
9,240
11.9
17.5
44.0
85.9
67.4
51.3
72.6
63.2
66.9
89.6
1937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14,197
31,966
36,914
44,544
101,043
110,273
31,719
10,601
30,845
7,140
24,265
31,084
1,604
 
74.7
96.5
19.3
54.5
30.8
1.5
 
총 액 489,318(100.0%) 202,101(100.0%) 41.3
1910∼30년 41,750( 8.5%) 4.1배 28,709( 14.2%) 68.8
1930∼36년 34,859( 7.1%) 4.2배 24,813( 12.3%) 71.2
1936∼44년 412,709(84.3%) 10.7배 148,580( 73.5%) 36.0
1910∼1945년간 총광산액에 대한 종별 비중(%)
금은광 강철 선철 철강 중석 유연탄 무연탄 아연 석면 소계
21.2 27.7 7.4 3.5 4.6 6.1 6.0 7.3 2.3 86.1

<표 2>광산액과 이출(대일 수출)액 (만엔)

*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Ⅰ(1948), 36쪽.

이처럼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의 명분 아래 재정·금융의 집중혜택을 받으면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광업의 비약적인 성장은 결국 조선이 보유한 지하자원이 비생산적으로 소진되었음을 의미한다. 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중국침략과 때를 맞추어 제정된<조선산금령>(1937. 7)은 1936년의 금생산액 20톤을 1942년에 75톤, 즉 ‘일본권’ 산금량의 55%를 조선에서 생산한다는 5개년 계획으로 제정되었다.026)당시 일본의 금생산량은 10톤 정도였다(水田直昌·土屋喬雄 編述,<金融機關の近代的改編とその發達(第5話)>, 앞의 책, 86쪽). 군수산업의 기초원료인 철과 원유의 자급도가 낮았고 ‘일본권’ 밖에서 기계류 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그에 대한 결제수단으로서 금 증산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027)朝鮮殖産銀行調査部,<朝鮮産金業の再檢討>(≪殖銀調査月報≫7, 1938), 28∼30쪽. 그러나 1943년 이후 원래 목표했던 증산계획기간이 끝나고 연합군의 대외무역봉쇄가 강화되어 무역결제자금으로서 금 증산의 필요가 없어졌다. 원래의 증산계획기간인 1937∼1942년간의 금생산액은<표 2>에서 같은 기간 광산액(17억여 엔)의 32%나 차지했다.028)金생산액은 1943년 이후 격감 추이를 보였다.

연도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총액
생산액 7,331 9,271 9,918 9,493 8,273 9,289 5,868 257 230 59,929

1937년 이후 금생산액 (만엔)

*조선은행 조사부,≪朝鮮經濟年報≫Ⅰ(1948), 81쪽.
이윤을 초월하여 채굴된 금은 조선경제의 내실을 채우는 것과 무관한 군수자재를 수입하거나 ‘기름을 사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유용되었으며 일본은행권 발행의 정화준비에 쓰여진 것이다.

연도
광구

(개)
주요 鑛種別 비중(%) 가동
광구

(개)
주요 鑛種別 비중(%) 가동광구율(가동광구수/총광구수 비율, %) 광업
出願
건수
(A)
광업
허가
건수
(B)

B/A
(%)
금은 금,은,
동,
아연
흑연 석탄 사철
사금
금은 금,은,
동,
아연
흑연 석탄 사철
사금
전체 금은 금,은,
동,
아연
흑연 석탄 사철
사금
1927
1931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5
2,175
2,390
5,596
6,513
7,454
8,623
10,574
12,090
12,505
11,735
12,130
10,577
29.1
37.6
57.8
58.6
58.1
56.6
55.3
53.1
51.2
51.7
50.1
32.8
8.0
5.9
2.5
2.2
2.1
2.0
2.2
2.0
2.0
2.2
2.3
3.1
21.5
22.2
19.7
20.0
25.0
22.1
21.3
21.9
27.8
26.2
26.0
31.4
5.4
6.0
2.6
2.7
2.8
2.8
2.7
3.3
3.2
3.5
3.7
7.0
21.7
14.8
6.7
6.1
5.8
5.4
4.6
4.4
4.4
4.5
4.5
5.7
4.6
3.9
5.5
5.3
4.9
4.5
4.1
3.9
3.7
3.1
3.0
2.3
366


3,902
4,523
5,206
6,503
7,084
7,254
6,828

733
35.8


71.1
70.1
70.4
66.4
65.4
54.2
54.2

 
7.7


1.3
1.1
1.2
1.2
1.2
1.8
1.9

 
16.9


7.4
9.5
11.4
14.8
16.9
26.6
25.7

 
9.3


2.3
1.8
2.1
2.2
2.3
3.0
3.4

 
15.6


3.8
3.7
3.6
3.4
3.4
4.1
4.2

 
2.5


7.8
7.0
6.7
5.9
5.4
3.7
2.9

 
16.8


59.9
60.7
60.4
61.5
58.6
58.0
58.1

6.9
20.7


72.7
73.2
75.1
73.8
72.2
61.4
60.9

 
16.0


34.0
33.3
37.4
32.8
34.6
53.1
50.4

 
13.3


22.1
23.2
31.1
42.9
45.2
55.6
57.0

 
29.1


50.3
39.2
44.4
50.0
42.0
54.7
57.4

 
12.1


37.7
38.3
40.6
45.6
45.4
54.6
53.9

 
9.0


88.9
86.8
90.6
87.8
81.1
58.7
55.5

 

1,805
10,153
6,105
8,116
15,721
16,411
10,548
6,243
4,706
9,798
1,266

343
1,445
1,268
1,357
1,466
2,237
1,886
1,020
372
995
390

19.0
14.2
20.8
16.7
9.3
13.6
17.9
16.3
7.9
10.2
30.8
  기간별 증가율(배) 기간별 증가율(배) 기간별 증가율(배)      
1936∼
41
1.92 1.35 1.70 2.67 2.28 1.40 1.35 1.86 1.42 2.65 6.73 2.48 2.02 0.89                    
1941∼
45
0.85 0.54 1.34 0.96 1.83 1.09 0.52 0.94 0.94 1.01 0.91 1.05 0.96 0.74                    

<표 3>광구수와 종류별 비중 (%)

*≪朝鮮經濟年報≫Ⅰ(1948), 85쪽, Ⅲ, 35쪽;≪朝鮮統計年鑑≫(1948), 118∼121쪽;≪朝鮮總督府統計年報≫(1940), 110∼111쪽. 가행광구수의 마지막 증가율은 1941∼1942년간임. 1945년의 가동광구 수는 7월 현재임,≪朝鮮經濟年報≫Ⅰ(1948), 86쪽.

<표 3>에서 ‘병참기지화’ 정책 시행 이후 1942년까지 가동광구의 대부분(54∼71%)이 금(은)광이었고 합금광을 포함하면 80% 정도나 차지했으며 광업 출원건수와 허가건수의 대부분(80∼90%)이 금광 또는 합금광이었다. 금(은)광은 1931년에 출원건수의 76%를 차지한 이후 채산성 있는 광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1940년에는 16%로 격감했다. 대신 이를 메운 합금광(금·은·동·아연광)이

1931년 14%에서 1940년에 64%로 급증했다. 이 기간에 금(은)광이 허가건수의 71∼51%로 감소한 반면에 합금광은 17∼34%로 급증했다. [허가건수/출원건수] 비율은 1942년까지 10∼20% 정도에 불과했지만 금(은)광의 출원은 해마다 수천건씩, 많을 때에는 1만 4,000여 건(1939년)이나 될 정도로 금(은)을 찾아 떠도는 부류가 대단히 많았다.029)≪朝鮮總督府統計年報≫(1940), 108∼109쪽. 금광이 많은 것도 일제의 금증산정책에 부응한 당시의 골드러쉬 추세와 어우러져 다른 광종보다 소규모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골드붐은 시간이 지나면서 채산성 있는 광구 탐색에 한계를 드러내 신규허가건수가 1940년(1,886건)부터 줄기 시작하여 특히 1942년(372건)에는 격감 추이를 보였다.

광산은 채굴에 착수했더라도 채산성 문제로 실제의 가동률이 현격하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실제로<표 3>에서 1920년대에 가동광구율(가동광구/광구총수 비율)은 20%도 안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41년 사이에는 광구수가 급증했을 뿐 아니라 가동광구율도 60% 안팎으로 급증했다. 그만큼 일제의 독려와 더불어 채산성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재정·금융의 혜택이 집중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가동광구수의 증가 추이도 곧 한계에 부딪혀 1936∼1941년간(3,902개∼7,254개, 1.86배)과 달리 태평양전쟁 도발 직후인 1942년(6,828개)에 바로 감소 추이는 반전되었고 1943년 이후 금광이 정리되면서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733개)에는 1941년의 1/10로 축소되었고, 1945년 말 총광구 수의 6.9%에 불과할 정도로 광산가동률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수이출품
총액
(만엔)
수이출품 총액에 대한 각 비중(%)
대일이출
비중
대만주
수출비중
농산품 광산품 광산품 중
광물 비중
공산품 공산품 중
섬유제품 비중
1920
1928
1929
1930
1931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19,702.0
36,597.8
34,566.4
26,654.7
26,179.8
59,331.3
68,554.2
87,960.6
100,679.3
94,780.9
97,319.8
94,472.2
70,500.7
91,960.2
86.0
91.2
89.7
90.3
95.1
87.3
83.5
80.8
73.2
78.2
81.0
79.6
72.8
79.3

6.9
8.0
6.9
4.1
11.0
13.4
16.0
22.7
15.5
13.5
15.3
19.3
16.4
64.1
58.1
61.7
62.7
66.3
55.7
48.0
49.2
31.6
18.3



 
11.8
4.9
5.4
5.6
4.8
11.1
14.4
13.6
17.5
26.8



 
(47.6)
(49.0
(52.3)
(53.2)
(65.5)
(70.2)
(57.6)
(61.2)
(93.3)
(57.6)



 
6.2
15.7
19.9
20.1
18.5
13.8
14.4
11.7
13.1
14.8



 
(73.6
(75.3)
(69.4)
(75.3)
(70.2)
(55.3)
(59.2)
(60.9)
(61.4)
(61.5)



 
기간별 증가율(배)
1928∼31
1931∼36
1936∼40
1936∼44
0.72
3.85
1.60
1.55
0.75
2.96
1.43
1.41
0.43
21.03
2.25
2.31
0.82
1.83
0.52
0.63
0.71
13.97
3.85
0.97
0.94
13.50
3.16
1.39
0.84
2.72
1.71
0.05
0.79
2.38
1.90
0.06

<표 4>수이출상품의 종류별 비중

*朝鮮銀行調査部,≪朝鮮經濟年報≫Ⅲ(1948), 43·44·48쪽.
비고:1941년 이후는 기타품목의 비중이 높게 잡혀져 있어 품목별 구분이 명확하지 못해 제외했음.

광산액 급증에 따라 수이출품 구성에서도 농산품 비중이 줄고 광산품, 특히 광물의 비중이 높아졌다.<표 4>를 보면 1936∼1940년간의 수이출총액 증가율(1.60배)을 이끈 것은 광산물이었다. 광산물의 수이출총액에 대한 비중과 증가율(11.1∼26.8%, 3.85배)이 급증한 반면 농산품(55.7∼18.3%, 0.52배)은 현격하게 축소되었고 공산품(14.4∼14.8%, 1.71배)은 정체된 모습을 보였다. 수이출 광산액 가운데 원광물의 비중은 60% 내외를 차지했다.<표 2>에서 광산액 중 이출 비율은 1910∼1936년간(71.2%)에 비해 1937∼1942년간(68.8%)에 다소 떨어졌다. 이것은 태평양전쟁을 전후한 1941년부터 해상수송에 차질이 생기면서 조선 내에서 소비되는 광물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반영한다. 수이출액이 1940년대에 감소 추이로 반전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본과 만주에 집중된 식민지 무역구조하에서 수이출액 증가율은 ‘조선공업화’ 기간인 1931∼1936년(3.85배)에 비해 기간이 훨씬 긴 1936∼1944년간(1.55배)에 크게 떨어졌다. 공산액의 경우처럼 수이출액은 특히 1943년에 격감했고 대만주 수출보다 바다를 건너야 하는 대일이출의 정체 또는 감소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처럼 1940년대의 생산력 정체와 감퇴현상은 여러 지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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