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2. 국가총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4) 언론통제정책

4) 언론통제정책

일제가 내선일체론에 입각하여 조선을 통치하는데 있어 구체적인 여러 정책들을 입안하기 위한 기반조성으로 가장 중요시하였던 것이 바로 조선인의 사상과 정보를 완전히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전쟁을 둘러싼 많은 유언비어와 아울러 그 속에 내재해 있던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을066)宮田節子,<朝鮮民衆の日中戰爭觀-「流言蜚語」を通して->(앞의 책, 1985), 11∼49쪽. 뿌리뽑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원천을 일제가 완전히 장악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등장하고 있는 것이<言論機關 統制計劃>이었다. 특히 이 계획에서 보이는 일제의 언론정책은 1920년대 일제가 표방하였던 ‘文化政治’를 일제 스스로가 완전히 부정해 가는 과정이었다.

<언론기관 통제계획>은 조선인 발행의 신문뿐만 아니라 일본인 발행의 신문도 통제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제가 내세웠던 통제의 사유는 조선인 발행의 신문과 일본인 발행의 신문이 각각 그 성격을 달리 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한 통제사유의 경우 기본적으로 기사의 내용에 대한 불만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단지 일제가 내세운 통제의 이유로서 중요한 것은 군소신문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일본의 유력한 신문들이 조선에 진출함으로써 과열경쟁에 빠져 운영이 곤란해지고 있다는 점과, 전시경제하에서 자재의 공급이 통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신문사의 경영합리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와 물자절약을 의도한 조치였으며, 이를 통해 강력한 신문사를 육성함으로써 일제 당국의 施政方針에 적극 호응하는 일본인에 의한 어용언론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인 발행 신문의 경우에는 그 목적이 강제 폐간을 통한 말살에 있었다. 즉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계획에 의해 언론기관의 정리작업이 실시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그 목적하는 바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조선인에 의해 발행되던 조선어 신문의 존재를 완전히 뿌리뽑고자 의도된 정책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언론기관 통제계획에 조선어 신문에 대한 통제안이 별도로 입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인데,067)<極秘. 諺文新聞 統制案>(≪大野文書≫1248, 1939).
이 통제안은 조선어 신문, 특히≪동아일보≫와≪조선일보≫의 폐간에 관한 것인데 御手洗辰雄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森山戊德,<現地新聞と總督政治-≪京城日報≫について->,≪近代日本と植民地≫7, 東京:岩波書店, 1993, 30쪽).
이는 조선어 신문에 대한 통제가 다른 일본어 신문에 대한 통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리고≪매일신보≫를 제외한 다른 조선어 신문들은 재고의 여지없이 폐간을 결정하는 가운데에서도≪동아일보≫와≪조선일보≫에 대해서는 그 처리 방안에 있어 여러 각도의 가능성을 상정해 보고 또 그에 따른 여론의 향배에 많은 관심을 보임으로써 이 언론기관 통제계획이 사실상≪동아일보≫와≪조선일보≫의 처리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먼저 조선어 신문 통제안이 대두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제가 조선어 신문에 대한 통제가 필요한 이유로서 가장 먼저 들고 있는 것은 조선어 신문, 특히≪동아일보≫·≪조선일보≫의 존재가 내선일체, 즉 조선인들을 황국신민화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068)<極秘. 諺文新聞 統制案>, 2∼3쪽. 그러나 언론기관 통제계획이 입안되고 실행에 옮겨지던 당시의 소위 ‘민족지’의 논조는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으며, 극단적으로 말해 총독부 기관지와의 구분이 불분명할 정도였다.069)정진석,≪조선언론사≫(1990), 538쪽.

즉 193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조선어 신문에 있어서도 상업화가 진행되고 또 점차 신문사가 대기업화하면서 경제적 타격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총독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기사는 감소하고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1936년의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070)森山戊德, 앞의 글, 24∼25쪽.
≪동아일보≫의 경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한 장기 정간에서 해제된 후 그 기사 내용을 時局에 잘 맞추고 있다고 일제측도 인정하고 있다(<諺文新聞統制ノ必要性>·<東亞日報廢刊ニ對スル關屋氏ノ質疑要領>,≪大野文書≫1248).
‘일장기 말소사건’에 따른 장기 정간으로 당시 3대 민족지 가운데 하나였던≪朝鮮中央日報≫는 약한 재정상태 때문에 그대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조선어 신문들의 저항이 눈에 띄게 감소한 반면 일제의 시책에 대해 지지하는 태도조차 보이는 사실에 대해 일제로서도 어느 정도 만족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단지 적극적 협력의 태도가 보이지 않고 기사의 논조에 있어 소극적이나마 민족의식을 암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는 정도였다. 따라서 일제가 말하는 장애물이란 이들 신문에 게재되고 있었던 기사내용이 아니라 조선어 신문 가운데에서도≪동아일보≫·≪조선일보≫가 지니고 있던 ‘민족지’로서의 상징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일제의 탄압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민족의식이 언제 이들 ‘민족지’의 존재를 빌려 폭발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작용하고 있다.

또 다른 통제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일본어 보급의 문제였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 실현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교육령을 개정하여 1938년 제3차<조선교육령>을 시행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학교 내에서의 조선어 사용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교수용어를 일본어로 한정시키고 조선어 수업시간을 감소시켜 종래 필수과목이던 것을 선택과목으로 하는 등 조선어를 말살하는 동시에 일본어를 보다 철저하게 보급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신문에 대해서도 신문이 지니고 있는 사회교육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가능한 한 조선어 신문을 통제하려 하였으며,071)<極秘 諺文新聞 統制案>, 3∼4쪽. 단지 일본어가 완전히 보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므로 그 때까지 조선어 신문을 존속시키기는 하되 그 형태는≪매일신보≫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조선어 신문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어 신문을 통제하려는 이유로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매일신보≫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어용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매일신보≫는 그 발행 부수나 조선인 독자의 확보에 있어≪동아일보≫·≪조선일보≫양 신문을 따라가기에는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일제의 불만은 상당히 강했다. 즉 조선인들이≪동아일보≫·≪조선일보≫양 신문을 조선민족 자신들의 신문으로 받아들이고 또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에 대한 위구심이었다.072)<極秘 諺文新聞 統制案>, 2쪽.

이상과 같은 통제계획에 기초하여 일제는≪동아일보≫·≪조선일보≫의 폐간을 실행에 옮겨갔다. 1940년 1월 일제는≪동아일보≫·≪조선일보≫양 신문사로 하여금≪매일신보≫와 통합하여 자진 폐간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대해 양 신문사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고, 아울러 일본에 건너가 폐간방침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결국≪동아일보≫에 대해 소위 ‘경리부정’사건을 조작하고 더 나아가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려 했다고 하여 신문사 간부 등을 대량으로 구속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양 신문사는 끝내 1940년 8월 10일자 신문을 끝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동아일보≫·≪조선신보≫의 성격이 아무리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고 해도 양 신문의 폐간이 조선인들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제가 언론기관 통제계획이 조선어 신문뿐만 아니라 일본어 신문도 통제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스스로가 이 계획을 보고 있는 조선인들의 여론의 행방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 계획이 노리고 있었던 ‘민족지’ 탄압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언론기관 통제계획이 지니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 단순한 하나의 언론통제정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모든 정책들은 일제의 전쟁수행을 위해 조선과 조선인들을 직접 동원시키려는 의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 계획은 그 일련의 기반조성과정 속에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사상과 정보의 통제를 의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상과 정보의 통제라는 문제는 당시 일제가 조선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내세우며 조선인들을 호도하려 하였던 내선일체를 통한 황민화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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