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2. 국가총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5) 조선어 말살정책

5) 조선어 말살정책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 일본어의 보급문제는 주도면밀하게 추진되고 있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육과정에서 조선어에 대한 교육이 완전히 배제되기 시작한 것은 1938년의 제3차<조선교육령>이후였다. 내선일체라는 통치이념이 전면에 등장하고 또 조선인들이 병력자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어 보급은 조선어의 완전한 말살을 의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어 보급률이 1940년 말 현재 15.5%에 머무는 극히 저조한 상황이었고,073)조선총독부,<第79回 帝國議會說明資料>(≪大野文書≫1236). 특히 농촌의 경우는 10%를 겨우 상회하고 있었다.074)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調査月報≫, 11-6(1940), 53∼54쪽. 이 때문에 일본어의 보급문제는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기본요건인 동시에 징병제를 앞두고 있었던 일제로서는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어 말살을 위한 일제의 정책은 여러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학교로부터 조선어 교육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작업이었다. 다음으로는 조선어 신문을 폐간시켜 조선어를 사회로부터 추방하고 있다. 특히 같은 조선어 신문이라 하더라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매일신보≫는 일제의 선전과 여론호도를 위해 남겨 두면서도 민족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던≪동아일보≫와≪조선일보≫만을 1940년 8월 강제 폐간시킴으로써 언론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아울러 징병제의 실시가 결정된 1942년에는 당시 일제가 전 행정조직과 일체화시켜 진행하고 있었던 ‘국민총력운동’의 일환으로 ‘國語全解·常用運動’을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075)大藏省 管理局,≪日本人の海外活動にする歷史的調査(朝鮮 3)≫4(1946), 47쪽. 전 조선인에 대해 일본어 상용을 강제하였다.076)이명화,<朝鮮總督府의 言語同化政策>(≪조선독립운동사≫9, 1995), 13∼1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 대한 일본어 보급률은 1943년에 이르러서 겨우 22%에 미치고 있었고,077)近藤釰一 編,<第85回帝國議會說明資料>(≪太平洋戰下終末期朝鮮の治政≫, 1961), 200쪽. 더구나 징병 적령자에 대한 일본어 보급률 또한 1944년 현재 30%의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078)조선총독부,<極秘 朝鮮人徵集ニ關スル具體的硏究>(≪大野文書≫1279-5, 1942). 이는 언어의 소멸이 곧 민족의 소멸이라고 인식하여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1930년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朝鮮學’의 연구성과와 그 가운데에서도 조선어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나타나고 있는 언어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이 이 시기 조선에서의 일본어 보급을 어렵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처럼 조선어에 대한 말살정책이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조선인들의 민족주의 사상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예가 1942년 ‘咸興學生事件’의 조작으로 비롯된 ‘朝鮮語學會事件’이었다.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 교내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학교 밖으로 나가면 일본어를 전혀 쓰지 않는 현실을 개선하고 이들 학생들을 통하여 일본어 상용을 각 가정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학생들에 대한 조선어 사용 단속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079)咸鏡北道 淸津府,<昭和 17년 5월 府尹郡守會議 諮問答申書>, 《昭和七年 府尹郡守會議 報告書綴 - 忠北 咸北 忠南》(국가기록원 소장번호 : CJA0003806). 그리고 관공서, 각종 단체, 상점 등의 직원들에게 집무시간 중 반드시 일본어를 쓰도록 하고 있는데, 만일 이러한 방침을 어기는 경우에는 많은 액수의 과태료를 징수하는 등의 제재방법을 사용하여 일본어를 반드시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다. 또 직원들에 대해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데 그치지 않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응대나 거래도 하지 말 것을 정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전화로 조선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전화를 중간에 끊어 버리도록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싸움이나 잠꼬대까지도 國語로’ 하는080)八木信雄,<徵兵制度施行の意義>(≪朝鮮≫326, 1942), 47쪽. 상태를 만들어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어 상용을 도모하는 동시에 조선어 사용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었는데 조선어를 사용한 출판물·영화·연극·방송·레코드 등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그 대신 쉬운 일본어를 사용하여 대체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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