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2. 국가총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6) 창씨개명

6) 창씨개명

創氏改名은 1939년 11월에 공포되어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된 制令 제19호<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과 제령 20호<조선인의 氏名에 관한 건>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전자에서는 조선인에게 종래의 ‘姓’ 대신에 일본의 가족법상의 제도인 ‘氏’를 새로이 만든다고 하는 ‘창씨’의 내용을, 후자에서는 새로이 만들어진 ‘씨’와 종래의 ‘名’에 대해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그 변경을 허가한다고 하는 ‘改氏·改名’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081)여기서의 ‘정당한 사유’라는 것은 조선식의 명칭으로부터 일본식의 명칭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조선의 ‘성’과 일본의 ‘씨’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잠시 살펴보겠다. 우선 일본의 ‘씨’는 한 사람이 속하는 ‘家(동일 호적의 가족집단)’의 명칭이다. 즉 ‘씨’는 ‘가’라고 하는 친족집단의 칭호이기 때문에 남계혈통은 물론 모계혈통과도 관련이 없다. 따라서 혼인이나 養子 등의 이유로 호적을 이동하여 소속하는 ‘가’가 바뀌면 그에 따라 당연히 ‘씨’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씨’는 개인을 ‘가’가 포괄함으로써 천황이 일본 모든 가족의 宗家가 되는082)권태억,<近代化·同化·植民地遺産>(≪朝鮮史硏究≫108, 2000), 121쪽. 일본 특유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족주의로 확대되고 있고, 또 더 나아가 전체주의적인 성격으로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조선에는 일본과는 달리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계 혈족집단인 ‘宗’이 있다. 그리고 이 남계 혈족집단을 식별하는 표시가 두 가지 있는데, 그 하나가 남계 혈연계통을 표시하는 ‘성’이고 다른 하나가 시조의 발상지를 나타내는 ‘本’이다. 이 두 가지 표시 즉 ‘본’과 ‘성’을 넓은 의미의 ‘성’이라고 하며, 언급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남계혈통의 표시로서 개인에게 붙는 것이기 때문에 혼인이나 기타 호적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일생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혈족·씨족·민족의 개념으로 연결되면서 확대되어 나아가는 것이다.083)宮田節子·金英達·梁泰昊,≪創氏改名≫(東京;明石書店, 1992), 47∼50쪽.

때문에 조선인의 창씨개명은 내선일체론에 입각하여 단순히 ‘성’을 ‘씨’로 바꾸고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는 가족제도의 동화정책·호칭의 동화정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혈통의 관념을 상대적인 것으로 격하시키고, 더 나아가 혈족·씨족·민족의 관념까지 말살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더구나 창씨개명이 시작된 시기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었을 경우 소위 ‘천황의 군대’의 일체성과 동질성에 혼란이 오지 않도록 조선식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려는 목적도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084)宮田節子·金英遠·梁泰昊, 위의 책, 39∼40쪽.

일제가 행정조직과 학교,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조직, 그리고 친일적인 조선의 지식인들을 총망라하여 대대적인 선전과 창씨개명 신청을 강요한 결과 8월 10일 현재 호적 총수의 7할 9분 3리에 달하는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였다. 창씨개명에 대해 일제는 절대 강제하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신청기간이 마감된 8월 11일 이후에는 제령 제19호 부칙 제3항에 따라 종래의 ‘성’을 그대로 ‘씨’로 하여 일방적으로 호적정리를 하였다. 때문에 나머지 일제에 저항하여 ‘창씨’ 신청을 끝까지 하지 않았던 조선인들의 경우에도 호적을 갖고 있는 한 모두 일제에 의해 ‘창씨’가 되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내선일체’의 구현으로 강조하고 있었던 창씨개명 작업도 조선인에 대한 철저한 차별 속에서 이루어진 민족해체작업이었다. 일제는 일본식의 ‘씨’와 이름을 조선인에게 강요하는 한편에서는 조선인들이 쓸 수 없는 ‘씨’를 정해 놓고 한번에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을 장려하고 있었다. 즉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하급의 일본인들을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 일제 동화정책의 본질이었다.085)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허용하는 일제의 정책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발도 매우 심했다(<朝鮮同胞ニ傳來ノ名字許與反對ノ件ニ付イテノ請願書>,≪大野文書≫1275, 1940). 조선민족을 완전히 말살시키기는 하되 이들을 일본인과 평등한 구조 속에 편입시킬 수는 없다는 발상이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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