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1) 1930년대 초반 농촌사회의 변화
  • (1) 식민지 지배정책과 농촌사회의 변동

(1) 식민지 지배정책과 농촌사회의 변동

1929년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공황이 발생하자 제국주의 열강은 심각한 체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식민지도 많지 않던 후발 제국주의 일본은 이러한 체제의 위기를 쉽게 타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공황의 피해를 식민지 조선에 전가하는 한편, 군국주의를 채택하여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기 위한 시책을 실시하였다. 즉 ‘제2의 內地’ 혹은 ‘內地의 大陸分身’241)全國經濟調査機關聯合會 朝鮮支部 編,≪朝鮮經濟年報≫(昭和15年版, 改造社), 107쪽.으로서의 조선에 1929년 부전강 발전소의 송전을 시초로 개시되었던 소위 ‘근대산업’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군수품 보급기지로서 조선의 역할은 더욱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도로의 개수, 철도의 부설과 같은 교통로를 정비하였으며 연안항로 및 항만을 정비하였다. 특히 조선에 대한 일제의 이와 같은 정책의 변화는 단순히 조선을 ‘병참기지’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朝鮮半島 그 자체가 日滿支블럭을 연결하는 紐帶인 것으로서 소위 ‘대륙루트’ 그 자체라는 인식에 기반”242)위와 같음.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배정책이 변화하게 된 원인은 첫째, 일본 독점자본은 국내의 과잉자본의 투자지를 필요로 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어떠한 제약도 없이 저렴한 식민지 노동력을 무제한적으로 착취할 수 있었다. 둘째 조선에는 일본 공업의 군사적 재편성을 위한 공업원료와 군수원료 자원이 풍부하였다. 셋째 지리적으로 보아 대륙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을 가지므로 그에 따른 공업화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넷째 조선에는<중요산업통제법>이 적용되지 않아 경제통제에 대한 자본의 도피처로 조선이 인식되었다.243)小林英夫,<1930年代 朝鮮‘工業化’政策의 展開過程>(≪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사계절편집부 편,≪한국근대경제사연구≫, 사계절, 1984에 수록). 이러한 결과 일제는 조선에 대한 공업화정책을 추진하였고 그에 따라 1930년 흥남조선질소비료공장이 설립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기존 산업구조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1933년부터는 새로운 산업구조로의 변화를 보였다.244)허수열,<일제하 조선의 산업구조>(≪국사관논총≫36, 1992), 278쪽. 이와 같은 새로운 산업구조로의 변화, 즉 광산의 개발, 발전소의 건설, 도로와 철도의 부설, 항만의 개수 등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여 한반도의 북부지방에 타 지방민의 유입을 초래하여 농촌사회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화’는 농촌과 농민의 철저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미 농촌으로부터 구축당한 농민층은 생존을 위하여 한반도의 북부지방과 북만주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는 ① 조선 내의 수요 증가에 대비하고, ② 농가경제의 성장으로 반도 경제의 향상을 도모하고, ③ 아울러 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목적245)朝鮮總督府 編,≪朝鮮産米增殖計劃要領≫(1922), 5쪽.으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산미증식계획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만성적인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일제는 종래의 우량 품종의 보급, 자급 비료의 증시, 경종법의 개선에만 그치지 않고 대규모의 관개개선 등 토지개량을 통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일부 지주층을 이용하여 수리조합을 설치하여 쌀을 증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 보고서는 “토지개량에 관한 주요 사업은 수리시설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산미증식계획은 바로 수리조합의 확충계획이었다.”246)淸水健二郞,≪朝鮮ノ農業ト水利組合ニオケル≫(1938), 21쪽.고 하였다. 예를 들면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설치된 수리조합은 192개였는데, 그 결과 자작농과 중소지주의 토지 상실과 함께 소작료의 고율화 현상이 더욱 가속화하였고 수리조합반대운동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247)西條晃,<1920年代朝鮮における水利組合反對運動>(≪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박수현,<식민지시대 수리조합반대운동-1920∼1934년을 중심으로->(≪중앙사론≫7, 1991).
서승갑,<일제하 수리조합 구역내 증수량의 분배와 농민운동-임익·익옥수리조합을 중심으로->(≪사학연구≫41, 한국사학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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