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1. 농민운동
  • 3) 1930년대 이후 농민운동의 성격

3) 1930년대 이후 농민운동의 성격

우리는 1930년대 이후의 농민운동을 농민조합운동과 천도교의 조선농민사운동, 기독교회의 농촌사업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하 농민운동은 1920년대 초반 소작쟁의를 시작으로 점차 이념적·조직적으로 발전을 하였다. 이 과정은 농민운동의 발전과정이자 동시에 국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농민운동은 크게 보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계열의 농민조합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천도교계통의 조선농민사운동이나 기독교계통의 농촌사업 등 개량주의적인 농민운동이다. 이 두 부류의 운동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운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농민조합운동은 일제의 타도와 함께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개량주의적인 농민운동은 당면의 현실문제 해결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코민테른은<12월테제>와<9월테제>를 통하여 기존의 운동을 검토하고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농민조합운동은 1930년대 초반 청년동맹·신간회 등 합법적인 단체를 해소하고 반합법적이고 계급적인 대중조직을 건설하고자 하는 운동노선이 관철되면서 혁명적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지역 단위로 조직되어 있던 계급·계층조직은 농민조합의 하나의 부서로 통합되어 농민조합은 명실공히 지역 단위의 운동지도부가 되었다. 그러나 혁명적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농민조합의 활동은 큰 차이가 없었다. 즉 정치투쟁 일변도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농민조합이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은 토지혁명, 노농소비에트 건설,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등 혁명적 강령 또는 슬로건의 표방 여부, 청년부(위원회)·농업노동자 등 계급·계층별 독자부서의 설치 여부, 혁명적 반대파(농조 내부의 좌익을 중심으로 한 독서회 등 핵심 그룹의 조직)의 결성 여부, 전 조선농민사 및 조선농민사의 박멸 혹은 비판 여부, 신간회 및 청총의 해소 결의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310)지수걸, 앞의 책, 155∼156쪽. 그리고 혁명적으로 전환한 이후에는 삼림조합·일선행정기관·경찰서·면사무소 등에 대한 폭력행사의 방식으로 운동 방향이 전개되거나 그 과정에서 지도부의 분열경향이 있으며, 운동은 빈농적 성격을 띤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농민조합운동은 좌편향적 성격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311)그러나 양양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농민의 일상적인 이익을 옹호·획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표면적으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조합원에 대한 교양의 내용은 혁명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로 보아 양양지역의 활동가들은 이웃인 강릉·통천·삼척·울진지역의 사례를 통해 운동을 보다 유연하게 전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제투쟁을 통해 농민층의 일상이익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농민층에 대중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민족해방이라는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방침은 운동의 실천과정에서 현실과 괴리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운동방침 상으로는 경제투쟁에 기초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것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치투쟁의 기반이 되는 경제투쟁조차도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통치정책이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으로 변하면서 합법공간이 극도로 축소되어 통상적인 민주주의적 요구마저도 부정당했던 시대적 배경 때문이라 할 것이다.

한편 농민조합의 지도부는 대개 지역사회의 전통적인 향반출신들이거나 지주 혹은 부농·엘리트라 불리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농민조합의 지도부는 ‘빈농우위의 원칙’을 표방하였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농민조합운동의 주체들이 ‘빈농우위의 원칙’을 ‘선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빈농우위의 원칙’이 배제하고자 하였던 것은 합법주의적 지도부나 개량주의적인 노선이었지 非貧農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312)이준식,<세계대공황기 혁명적 농민조합의 계급·계층적 성격>(한국역사연구회 편,≪역사와 현실≫11, 역사비평사, 1994), 138쪽. 또한 농민조합은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을 결합하여 투쟁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적으로 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이들은 기관지 및 출판물을 통하여 또는 독서회·야학 등을 통하여 농민층에 대한 교양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기념일투쟁을 통해 농민층을 동원하고 농민조합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투쟁을 통한 조직방침’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천도교와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어 실시한 개량적 농민운동은 당면의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하는 점에 중점을 두고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천도교의 조선농민사운동과 기독교회의 농촌사업은 3·1운동과 그 실천과정에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절감한 항일운동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채택된 점에서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

먼저 조선농민사는 천도교의 전위조직인 천도교 청년당과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인물들이 조직한 농민운동단체였다. 이후 성장과정에서 조선농민사는 천도교 청년당의 인적·물적 지원하에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1930년 전조선대표대회를 통하여 이를 합법적인 관계로 확립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선농민사는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직접 전개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자치운동을 당면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리하여 조선농민사는 농민자주촌의 건설을 통해 자치운동을 실천하였다. 이는 곧 농민의 일상이익 획득운동이라는 조선농민사의 운동논리로 이어진다. 즉 조선의 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농민을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한 방법으로 농민의 일상이익을 옹호·획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하여 조선농민사는 야학·강연회·출판물 등을 통한 농민대중의 교양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알선부와 공생조합을 통해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러한 운동노선은 천도교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농촌사업에서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회 역시 농민층의 일상이익을 옹호, 획득하는 것을 운동의 주요한 노선으로 하였다. 즉 기독교회의 농촌사업은 농사개량·부업장려·협동조합의 설립·관련 서적의 출판 등 다양한 방면에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야학·서당·하기 아동성경학교 등을 통하여 문맹퇴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천도교의 조선농민사의 활동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는 곧 천도교와 기독교회가 추구했던 농민운동의 목표가 당면의 일상이익을 옹호하고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민족의 해방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조선농민사와 기독교회의 농촌사업이 개량적인 운동으로 자리매김되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제가 1930년대 초반 실시하는 농촌진흥운동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며 실제로 농촌진흥운동에 순응한 경우도 있다.

다른 한편 각지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던 개량적인 농민운동을 포함하여 농민운동은 193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는 전시체제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일제의 농산물 강제공출, 노동력의 강제 동원, 군수 농작물의 강제 재배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로 보아 표면적으로 이 시기는 농민운동의 침체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해방 직전의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농민운동의 역량이 지역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 생존했는가 혹은 해방 이후 단시간 내에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과 같은 조직이 어떻게 조직될 수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농촌사회와 농민운동의 역량 및 조직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趙成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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