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2) 1930년대 여성운동 변화의 기폭제로서의 근우회 해소

2) 1930년대 여성운동 변화의 기폭제로서의 근우회 해소

槿友會 해소는 단순한 사건은 아니었다. 독립적인 여성단체의 불안한 독자적 발전의 노력이 민족해방 혹은 계급해방운동 속으로 흡수, 수렴되어진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흐름에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350)金貞媛,<현단계 여성운동을 여시아관>(≪批判≫1, 1931. 5), 92∼94쪽. 김정원은 청진지회 대표로 1930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아직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므로 그대로 존속하면서 노농부녀운동을 중심으로 나아가자는 의견이었다. 당시 주된 세력은 아무래도 사회주의운동의 국제노선에 따라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던 층이었다. 근우회 해소가 정식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소에 대한 조직적 반대대응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여성노동자·농민의 대중적 요구와 투쟁은 거세져 가고 조직적 운동은 근우회 해소론에 입각하여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이해를 위해 근우회 해소 시점의 상황과 해소론을 간단히 살펴보자. 근우회 활동은 초기에는 조직정비와 더불어 선전계몽활동에 노력하였다. 1929·1930년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자 구체적인 여성의 요구를 제시해 냄으로써 미조직 여성의 조직과 여성운동방향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조직을 다지고 근우회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본부 간부들은 지방순회 강연을 하고≪근우≫를 발간하였으며, 지회에서는 야학을 설치하고 운동가 양성을 위한 부인강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노동·농민 여성의 조직화에 노력하여 노농부반을 설치하였다.

지회는 각 지역여성을 조직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지회는 정치문제를 다루어 일제의 탄압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회는 단순히 본부의 운동방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본부에 요구하여 勞農部를 설치하게 하고 여성노동자 관련 결의사항들을 요구하는 등 근우회를 발전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진지회는 노농부인의 조직과 借家人同盟의 조직, 무산아동 보호활동을 벌이는 등 대중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업을 펼쳤다. 이외에도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동래와 홍원 지회 등에서 여성노동자와 여성농민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의 노농운동에 참가하였다.

근우회는 여학생운동 지원활동에도 공을 들였다. 아직 민중 속에서 여성지도자가 나오지 않았던 상태에서 여학생들은 각 부분운동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근우회가 여학생운동을 지원한 대표적 예로는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여 벌인 서울 여학생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위에서 許貞淑·朴次貞 등 근우회의 사회주의계 인물들이 연루 검거됨으로써 근우회는 보수적 입장을 지닌 측이 실권을 쥐게 되었다. 1930년 12월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근우회의 운동방침을 수정하여 계몽운동에 매진키로 하여 노농부를 폐지하고 대중성을 갖출 수 있는 중요한 조직체인 반 조직을 규약에서 삭제하였다.

근우회의 우경화는 당시 新幹會·朝鮮靑年總同盟 등에서의 대중운동에 대한 반성과 방향전환 논의와 더불어 해소론을 야기하였다. 당시 제기되었던 근우회 해소론을 정리하면 첫째 근우회는 소부르주아적이고 투쟁성을 상실한 개량주의적 단체이므로 즉각 해소하고 그 역량을 노농운동 강화에 돌려야 하며, 둘째 성별 조직은 계급역량을 분할시킨다는 것이었다. 근우회 본부에서는 해소논의를 위한 전국대회를 시도하였으나 유회되어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근우회 해소는 당시 전체 사회주의운동의 방향전환과 같은 구도 속에 있었고, 한편으로는 실제로 당시 민족개량주의의 대두, 민족내 계급갈등의 격화 등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직방식이 분출하는 민중여성운동을 감당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해소 이후의 운동방향을 충분한 논의도 못한 채, 다른 조직체들의 해소 움직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해소하고 말았다는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여성대중의 기반을 확대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었지만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으로 조직되기 어려운 계층에 대한 고려도 거의 없이 해소하였던 것은 여성운동의 역량강화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지도역량이 크게 부족한 여성운동이기 때문에 특히 그러하였다.

사회주의운동의 흐름 내에서 반제동맹 같은 민족부르주아지나 중간계급을 위한 조직구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의 좌경적 운동방침은 여성들이 일상적 생활 속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여성지식인층의 활동은 아예 운동전선으로 뛰어 들지 않으면 1910년대와 유사하게 직업부인의 친목활동이나 YWCA(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 기독교 여자청년회), 천도교 여성단체 등의 종교단체와 학교 등의 활동영역에 갇히게 되다시피 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지 않고 가능한 방향으로의 활동선택 방법이었지만, 또 일제의 체제내적 회유의 늪에 빠지는 것이기도 하였다. 합법과 비합법 공간의 적절한 활용이나 결합을 통한 다양한 운동방식의 부재가 이 시기 여성운동이 계급중심적 운동으로만 치닫고 다양한 여성을 운동선으로 끌어내는 여성운동을 펴 내지 못한 중요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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