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3. 여성운동
  • 3) 1930년대 전반기 여성운동
  • (2) 여성농민운동

(2) 여성농민운동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그 반이 여성농민이었다. 가족단위의 농업생산노동에 종사하였던 여성농민은 생산물에 대한 관리권이나 처분권을 갖지 못하였다. 게다가 가부장적 요소가 강고하게 남아 있던 농촌에서 여성들 특히 빈농층 여성은 농업생산의 주체로서 노동비중이 컸다. 이러한 여성농민 앞에는 가부장제와 소작제 두 가지 해결과제가 있었다.

1920년대 초 이후 소작인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지만 여성농민들은 농민운동에 공감했어도 농촌의 봉건적 인습과 여성들의 소극성에 의해 조직활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예외적으로 농민단체 내에서 직접 활동한 여성농민들은 대부분 사회의식이 높은 과부나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었다. 일반 여성농민들은 남편이나 남성 가구원이 운동에 몰두할 동안 집안의 대소사와 노동을 더욱 많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 중후반기가 되면 암태부인회같이 여성단체가 주체적으로 소작쟁의 참가,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근우회 지회나 192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는 청년동맹의 여성부에서 여성농민의 의식을 제고하여 조직하려는 노력이 부분적으로 기울여졌다.

한편 조직을 기반하지 않은 여성농민의 대중적 진출도 활발하였다. 당시 농민운동의 주요 내용은 소작권옹호, 일제에게 침탈당한 토지소유권 및 이용권의 쟁취, 수리조합과 같은 일제 수탈기구에 대한 투쟁 등의 생존권운동이었다. 그외에도 여성농민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숱한 검거자들이 속출할 때 가족·이웃·동료로서 구원활동을 벌이고 구속자 석방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여성농민의 투쟁은 일회성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많은 농민대중을 포용하고 있었던 사회주의적 농민단체에서는 여성을 운동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여성농민의 특수 요구까지 운동의 목표로 삼는 데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에 반해 농촌에 자기활동의 기반을 두고 있었던 민족주의측, 특히 종교단체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여성농민들을 적극 조직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들 단체의 성립은 다분히 사회주의를 의식한 결과이긴 하였지만 사회주의계에 비해 여성농민들의 생활실상을 비교적 생생히 이해하였다. 특히 朝鮮農民社의≪조선농민≫에선 남성농민의 보수성과 가부장성에 대한 절절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그리고 천도교의 경우 지방 포단위에 여성부를 두는 등 여성농민에 대한 조직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조선농민사나 기독교계 활동은 목적 지체를 포교에 두고 여성농민문제의 근본적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요한 지식획득이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 자립, 봉건적 인습타파, 의복개량 등 계몽적·개량적 방법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1930년대 여성농민운동은 이러한 운동의 경험 위에 전개되었다. 1930∼1931년 신간회·근우회·조선청년총동맹 해소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계급적 성향이 불분명한 이들 조직을 해소하고 계급운동진영으로 모이자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운동에서는 빈농을 중심으로 여성은 부녀부로, 청년은 청년부로 편제하여 농민조합에 배치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지역적으로 함경도에 그 전형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920년대와 달리 1930년대는 운동방침에서나 실제 활동에서도 농민조합에서의 여성부서 설치는 꽤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여성부서의 설치는 조직위상에 따라 차이가 있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서 설치되는 경우는 적고 또 농민조합이라고 해도 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는 초창기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일제의 폭압으로 합법적인 활동공간은 매우 좁아지지만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서 여성농민의 진출이 크게 눈에 띈다. 이것은 농민조합 내에 여성부의 설치와 관련되는 현상이다. 여성농민의 요구를 수용하고 여성농민을 조직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관심은 여성농민이 활발한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의식적인 조직 설치와 여성농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결과이기도 하였다.

함남 정평군을 통해 1930년대 초 지방운동단체의 변화양상을 간단히 살펴보자. 정평은 북부지방이 일반적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농민운동단체가 일찍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1926년 경 사회주의적 청년단체가 결성된 이후 이것이 모체가 되어 1927년 定平農友會가 결성되고 1928년 2월에 朝鮮農民總同盟 定平農民同盟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정책으로 일반 민주주의와 농민에 관한 조항과 더불어 ‘조혼 및 강제 결혼 폐지’, ‘인신매매의 사실상 폐지’, ‘여자천시관념철폐’ 등의 조항이 채택되었다. 1930년 6월 정평농민조합으로 바뀌고부터는 조직적인 차원에서도 여성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반영되어 농민조합에 청년부·부인부·소년부를 두어 정평청년동맹·定平女性同友會·신상여성동맹 등의 맹원을 농민조합으로 흡수한다는 방침을 취하였다. 행동강령에서는 여성관계내용으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불’, ‘부인과 청소년에 대한 봉건적 억압 타파’, ‘청년부·부인부·농업노동부·소년부의 설치 촉진’ 등이 제시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 조합원의 대검거 직전 정평농민조합의 군 단위조직의 부서는 집행위원장·서기·상무집행위원·쟁의부·조직부·소비조합부·부인위원회·청년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평의 부인위원회는 부장과 부원이 모두 남자이고 상무집행위원들이 겸임하고 있었는데, 부인위원회가 설치된 것이 독특하다.359)박경식 편,<정평농민조합검거개황 및 판결문>(≪조선문제자료총서≫6), 485∼549쪽

이같이 일반적으로 군 단위로 이루어진 1930년대 혁명적 농민운동은 군 단위에 지도부가, 면에 지부, 리동에 반과 같은 조직체계를 갖춘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부서가 설치되었는데, 조직부·선전부·쟁의부·구원부 등의 기능별 부서와 부녀부(부인부·부녀대책부 등 이름은 다양하다)·장년부·청년부·소년부·농업노동자부·화전부와 같은 계급계층별 부서가 같이 설치되었다. 정평 이외에 여성부서는 영흥·단천·흥원·문천·울진·성진·경성·온성 등의 혁명적 농민조합에서도 설치되었다.

그런데 부서 설치는 지방에 따라 달라 군 단위에만 설치되거나, 면·동리까지 설치되기도 하였다. 또 가장 기본적인 반의 인원도 비합법적 상황에 적합한 3∼7명 정도인 경우, 20∼30명의 대단위인 경우 등이 있었다. 부서가 반 단위까지 설치되고 반 인원이 당시 비합법활동에 걸맞게 소수로 구성된 곳은 영흥과 문천 등이었다. 1932년 영흥 2차농민조합은 3명의 반위원회에 소작부·노농부·청년부·부인부가 설치되었고, 1934년 문천농민조합준비위원회는 각 리에 3명을 단위로 한 장년반·부인반·청년반·소년반 등을 조직하고 리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부녀부가 군 단위에 설치된 경우보다 여성농민과 좀더 접촉면이 큰 반 단위까지 부녀부나 부녀반이 설치된 경우는 운영이나 여성농민의 조직정도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 단위까지 조직되면 조직·교육 등에 여성농민의 특수 요구가 잘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부는 정책연구나 교육을 담당했고 다른 부서와 달리 각 단위위원회 활동에 조응하여 부녀간의 종적 연결로 여성에 관한 활동방침을 설정하고 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혁명적 농민조합이 반합법·비합법 상태에 있었으므로 독자부서로서 얼마나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여성농민에 대한 문제인식과 활동방침 및 활동내용을 살펴보자. 여성문제인식이나 활동방침이 집약되어 표현된 것이 강령이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강령에 여성문제가 언급되는 것은 이 시기 일반적인 경향이었는데, 특히 1931년 영흥농민조합, 1932년 경 전북동맹, 명천 등에서는 부인에 대한 강령이 따로 설정되었다. 특히 격렬한 운동을 펼쳤던 명천 지방에서는 투쟁강령이 그 목적에 따라 투쟁강령, 정치투쟁강령, 소작농·일반농민·농업노동자 행동강령, 청년부·소년부·부인부 행동강령 등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이때 슬로건으로 제기되었던 것은 1920년대 전반보다 더욱 포괄적인 농민의 요구로서 소작조건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제 농정에 관련된 누에고치·목화 등의 공판제, 수리조합·농회·삼림조합·화전농 문제 등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각 지역마다의 농업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여성노동의 비중이 컸던 밭작물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여기에 여성관계사항으로 인신매매 등 봉건적 인습 철폐, 여성을 억압하는 일체의 악법 폐지 등이 일반적으로 제기되었고 점차 명천처럼 ‘국고부담의 탁아소와 무료산파원의 설치, 조혼제 금지와 강제결혼과 인신매매의 철폐, 농촌여성들에 대한 정치·사회적 차별대우의 철폐, 여성을 위한 야학 설치, 일제 어용단체인 여자청년단·부인단 등의 즉각적 해체’와 같은 구체적 구호로 발전되어 나갔다.

1934년 9월 경부터 1936년 10월 경까지 활동한 城津農民組合再建委員會에서는 여성문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인식하고 운동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 현재 여성에 대해서는 남존여비·현모양처주의·삼종지도·칠거지악·매매혼제도 등 정치·경제·문화 방면에서 자유는 전혀 구속되어 있다. 이 특수한 불평 등을 격발하기 위해 교양훈련지도를 한다.

―. 결혼문제에 대해서는 강제결혼반대, 결혼자유획득, 당사자간의 의견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될 때까지 결혼을 기다린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되고 혼기가 오면 부모와 봉건적 타협을 이용하여 결혼할 것.

―. 여성접촉문제에서는 청년시대는 정력적이기 때문에 남녀 일인씩의 접촉은 절대로 하면 안되고 만일 주의운동 중 사랑에 빠지면 전연 안되므로 이 의미에서 남 1인에 여 2인(여 1인에 남 2인)식으로 주의를 요해야 한다.

 (≪사상휘보≫, 제10호, 1937, 35쪽).

이렇듯 아주 세심하게 여성조직원의 행동까지 거론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조직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갔다. 처음에는 이전부터 활동하던 이들을 재조직하고 또 명천의 방침처럼 농민조합의 간부는 우선 자신의 부인이나 딸·동생의 의식을 깨치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마을 부녀자에게 결혼의 자유, 여성해방을 말하도록 하여 여성들을 동지로 획득하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독서회나 야학·연극·강연회나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들의 대부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출판활동을 통해서 여성들을 조직해 갔다.

부녀자나 소년소녀를 위한 야학활동은 가장 일반적 형태이고 활발하였는데 여기서 여성들은 문자해독뿐만 아니라 혁명이론, 혁명가에 대한 학습, 시위방법, 경찰관 혹은 관청습격 등을 연습하였다. 그리고 여성들은≪부인론≫(정평)·≪조합부인강좌뉴스≫(영흥)와 같은 책이나 ‘부인의 권리’(경성)·‘근로하는 부녀’(북청)라는 연제의 강연 등을 통해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인식의 기회를 넓혀 갔다.

연극도 적극 활용되었다. 함남 함주에서는 1938년 일반 부녀자에 대한 공산주의 선전방법으로 프로연극에 의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자유를 찾아서’ 등의 연극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사상을 고취하도록 하였다.

1930년대 활동에서 출판활동은 내부 조직원들의 사상적 통일을 기하고 교육자료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등사기나 기타 출판에 소요되는 물품까지 일제의 통제·감시가 극심하여 매우 구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감시의 눈을 피해 동굴이나 산중천막·폐광·지하 아지트 등에서 출판물을 펴내었다. 그리고 이때는 비합법 시기였기 때문에 출판물 반포 범위가 종류에 따라 세분되어 조직성원 교육용이나 내부회람용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여 조직성원용 출판물과 일반에게 배포되는 선전물은 비교적 엄격히 구분되고 있었다. 농민조합의 일반출판물에는 ‘부녀란’ 같은 것을 따로 설정하여 일상적으로 투고를 받았으며 여성들을 위해 명천에서는<부녀동지>, 영흥의<부인동무>, 문천은<무산부인>등의 이름으로 팸플릿이 간행되었다. 영흥농민조합에서 1932년 경에 간행된<부인동무>란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조선 프로여성동포들이여! 조용히 가정생활에 일생을 희생하지 말고 신사회 건설에 진실로 전투부대가 되어 우리의 적 제국주의놈들을 모두 타살하자”, “그러면 우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사업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순된 제국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계급 없는 소비에트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 프로부인이여, 우리 전위투쟁 혁명사업의 역군이 되라”, “우리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사회를 건설하자.”

이러한 노력의 결과 여성농민들의 진출은 매우 활발해졌다. 이것은 여성들의 검거자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1931년 영흥농민데모사건으로 10월 23일까지 검거된 농민 350여 명 중 여성이 22명이었고 1935년 명천좌익농민조합의 2차검거 때 피검된 여성들은 27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1932년 정평농민조합재건위원회에서는 120여 명의 여성들이 각종 활동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그 이전에 근우회나 소년회·청년회 등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재편된 혁명적 농민조합에 참가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야학이나 각종의 농민조합 활동에 의해 1930년대 전후 새로이 운동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농민조합활동을 하던 여성들의 연령별 구성에서 잘 알 수 있다. 매우 한정적인 자료이지만 정평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정평은 1930년 말 조합원수 4,147명 중 여성은 290명(7.0%)이었고 이들의 연령별 분포는 20세 이하 153명 52.8%(남자는 881명, 남자조합원 중의 비율이 22.8%), 25세 이하 72명 24.8%(남 1,223명, 31.7%), 30세 이하 44명 15.2%(남 870명, 22.6%), 35세 이하 15명 5.2%(남607명, 15.7%), 35세 이상 6명 2.1%(남 275명, 7.1%)였다.360)박경식 편,<정평농민조합검거개황 및 판결문>(≪조선문제자료총서≫6), 498쪽. 연령으로 보아 여성들의 조합활동은 50% 이상이 청소년층이 중심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남성들의 비중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이와 같이 청소년과 청년층이 중심이 된 것은 계속되었지만, 농민운동에서 희생자 가족에 대한 구원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또 구원활동을 통해 조직확대도 주목하게 됨에 따라 여성들의 연령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이 농민운동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한 경우도 눈에 띈다. 1938년 2월에 검거된 梁鳳順과 李仁順의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361)≪사상휘보≫제21호(1939년 12월), 259쪽. 이미 원산·흥남 등지에서 노동운동 등의 활동으로 일제의 검거대상이었던 양봉순과 함주군 농회의 양잠교사를 하던 이인순은 함주에서 韓寅誠·李景允 등과 독서회·陵前농민조합 등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였고, 여성농민에 대한 교육 및 조직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고 활동경험이 적기 때문에 지도적 인물이 적었다. 대부분의 일반 여성조합원들은 교육·구원·출판 등의 조직내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한편 여성에 대해 감시가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농민조합 간부간의 연락과 각종 선전물의 운반 배포, 일제 경찰이나 스파이들의 감시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하나 주목할 것은 함북 穩城의 경우인데 온성은 1934년 중국공산당 東滿特委 汪淸縣 東北人民革命軍과 상호연결되어 중공당 발행문서를 조직원들 사이에서 돌려보기도 하는 등 중국 운동에 꽤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인민혁명군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온성 결사원들에게서 일정금액을 거두기로 하였다. 이때 남자는 1원 20전, 여자는 60전을 징수하였다.362)≪사상휘보≫제9호(1936년 12월), 238쪽. 여성조직원에게서 거둔 금액은 남자의 반이었다. 이것은 당시 여성들의 경제상태를 고려한 배려이고 이러한 것은 활동전반에서 여성들이 활동하는 데 질곡이 되는 것을 제거·약화시키는데 꽤 세심한 노력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여성농민들은 조직원은 아니더라도 가족으로서 운동에 참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1930년 端川森林組合 반대투쟁이나 1931년 대동군의 미림수리조합지역 소작인회에서 벌인 수세·지세 등의 공과금 지주부담을 위한 투쟁과 같은 대중투쟁에도 여성가족원들의 참가는 일반적이었다. 정평 지방에서 검속된 조합간부가 사망했을 때에도 여성가족원들이 운동을 전개해 가는 데 구심점이 되었으며, 1932년 경남 梁山농민조합에서는 검속된 조합간부의 탈환투쟁을 검속자의 가족들, 특히 부인이나 어머니들이 같이 싸우다가 1명의 여성이 경찰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당시 일본인 여성조차도 정치적 활동이 법률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고 조선 여성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하 조선남성에게 주어진 알량한 권리까지 부정되었던 상태였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농민조합활동을 하였어도 남자들과는 달리 아주 구체적인 활동근거가 있거나 지도적 인물이 아닐 경우에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어도 실형을 받는 여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편과 같이 활동했을 때 남편이, 다른 남성 가족원과 같이 했었다면 남성가족원이 대표로 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치안유지법>위반자 219명의 여성에 대한 일제측 조사363)≪사상휘보≫제11호(1937년 6월), 52∼63쪽.를 통해 이때 활동한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조사자 219명 중 기소된 인원은 46명이었고, 17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직업별로 보면 무직자 112명, 학생 41명, 노동자 37명, 전문직(교사·산파·보모·간호사·사무원 등) 15명, 농업 12명, 기타 2명이었다. 여기서 직업이 농업으로 분류된 사람은 12명에 지나지 않으나 무직자로 처리된 112명 중에는 농민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교육정도는 무교육자 17명(8%), 초등정도의 교육 93명(43%), 중등정도 104명(47%), 고등정도 5명(2%)이었고 사회운동 경력은 92명이 있었다. 이들의 연령별 분포는 17세 이하가 21명, 18∼20세 93명, 20∼25세 87명, 26∼30세 14명, 31∼34세 3명, 36∼40세 1명이었다. 이들이 활동하게 된 동기는 대부분 사회주의자와의 교류나 권유, 좌익문헌의 탐독이 기본적이었고, 생활난이나 결혼제도에 대한 불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 등 사회구조의 문제를 직접 경험한 데서 비롯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이 각종 사회운동에 참가하여<치안유지법>으로 실형을 받는 경우는 9년 동안 46명 이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대신 여성들의 운동참가를 훼방하는 일제의 방법은 일반대중이나 부형·남편에게 농민조합활동은 하는 여성들은 “성도덕이 문란하다”, “붉은 색에 물들면 결혼 상대가 없다”는 등의 악질적 선전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본 성진농민조합처럼 대부분의 농민조합들은 규율을 강화하여 조직원의 남녀관계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제는 여성이 참가한 운동마다 악랄한 선전을 빼놓지 않았다. 여성운동가들이 봉건적 정조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일제가 노린 것은 가족들이 여성을 감시·감독하여 운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제는 직접적으로 부형들을 선전회유하여 자위단 같은 괴뢰조직을 만들어 운동을 감시·보고하는 스파이 노릇까지 하도록 강요하였다.

민족개량주의계의 농민운동은 1920년대에는 비록 농민과 노동자의 차이점을 말살시켜 농민의 계급분화를 애매하게 하여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부정하였다. 이 때문에 농민이 조선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계열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는 있었지만, 민족개량주의계열도 부분적으로 농민권익옹호를 위한 활동을 하였고 이때까지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가면 그들의 개량적 시도는 농촌진흥운동에서의 개량적 구호, 예를 들면 문맹퇴치·금주·금연·절약·저축·미신타파 등의 구호와 일치되었다. 즉 사회주의운동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민족개량주의운동은 지지 후원하여 민족분열을 꾀하던 일제와 타협하여 그 비호 하에 왕성하게 자기 사업을 펼쳐갔다. 여기서는 민족개량주의의 대표적 예로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천도교는 1920년대 구파 여성동맹과 신파 내수단으로 분립되어 있던 것이 구파 여성들의 검거, 세력약화 및 천도교 전체의 통합움직임 등에 의해 1931년 3월 천도교 내성단으로 통합되었다. 조직체계가 잘 서 있던 천도교는 각 지방의 활동내용이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데 그 중 활동이 꽤 활발하였던 곳이 귀성군이었다. 평북 귀성군 천도교 내성단에서는 1931년 4월 독특한 토의가 있었다. 즉 “포덕사·종리사·종법사를 여자로 선출하도록 각 기관 대표에게 요구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포교활동에서 여성을 대표로 낼 수 있도록 하자는 여성들의 주장은 기독교에서 여성목사·장로가 될 수 있는 여자 치리권 획득을 요구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점은 여성들의 활동이나 여성의 자각이 크게 높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활동내용은 미신타파·문맹퇴치·농촌여성야학 개최·독서운동·색의장려 등 다른 지역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이것은 천도교측의 농촌문제의식, 계급적 기반, 정치적 성향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천도교에서는 농촌피폐의 원인을 농민의 무지와 나태로 보고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공동경작·부업장려·생활개선·화폐지출억제·공동저축 등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여성농민들의 활동도 민족문제나 계급문제에는 거의 접근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천도교 여성단체는 신구파의 분열로 다시 1932년 말 내성단도 나눠지면서 단세도 약화되었다. 1936년 4월 경 천도교 신파의 경우 85개의 단과 5,000여 명의 단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합동 전보다 적은 수였다. 그리고 일제의 통제로 1939년 자진해산하였다.364)김응조,≪천도교여성회 70년사≫(천도교 여성회본부, 1984), 122쪽.
조규태,<천도교 내수단과 여성운동>(박용옥편,≪여성;역사와 현재≫, 국학자료원, 2001), 298쪽에서 재인용.

기독교에서는 여성농민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동하였는가. 기독교여성들도 교단의 전체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채택한<사회신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류를 형제로 믿으며, 기독을 통하여 제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사회의 기초적 이상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일체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하고, 나아가서 기독교 전도와 교육 및 사회사업을 확장하여 기독 속죄의 은사를 받고 갱생된 인격자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사회조직체 중에 기독정신이 활약케 하고, 모든 재산은 신에게서 받은 수탁물로 알아 신과 인간을 위하여 공헌할 것을 믿는 자이다(최민지,<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운동>, 한국기독교 백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 편,≪여성 깰지어다 일어날 지어다 노래할 지어다≫,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이러한 입장은 당시 기독교의 일반적·사상적 경향을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며 이후 활동의 내용을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여성농민에 대한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1934년 감리교회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신촌 연희전문학교 근처 신촌농민수양소에 있던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의 목적은 “배워 알고 미신 버리고 쓸데없는 예식·형식을 버려 경제적 여유 도모하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간단하게 살고자 함”에 두어져 있었다. 강사는 金活蘭·黃愛德·홍애시덕·申興雨·朴仁德 등이었고 과정은 1개월 정도에 수양강좌·가정강좌·농촌상식강좌·요리·재봉·세탁·염색·육아·가정위생·역사·지리·동요·유희·가정부업 등이었다.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계의 농촌여성에 대한 활동은 천도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지식보급·산업진흥·절약·저축생활장려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는 경제공황의 영향과 그 피해를 조선민중에게로 전가하여 농민의 피폐는 일반의 상상을 넘은 상태였다. 양식있는 많은 식자들은 농촌 피폐의 책임이 일제에게 있음을 공공연히 지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격렬한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측에서는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에서 내세운 방침과 똑같은 입장에서 농촌문제를 풀자고 하였다. 게다가 기독교 농촌운동가로 명성이 있던 박인덕은≪신동아≫의 1933년 하기계몽운동에 대한 이동좌담회에서 경찰의 금지·허가지연으로 활동이 중지되는 사례가 많은 데에 대하여, “효과를 보는 것이 상책이며 방법 여하는 선택할 것이 아닙니다. 진흥회나 교회를 통하는 것이 퍽 용이한 모양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공개적 발언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도 이용하면 활동의 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 활동의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때 사회주의계에서도 진흥회를 농민들과 접촉할 수 있는 장으로 주목하여 실제로 이 장을 이용한 예가 많았다. 그러나 일제는 사회주의계열에 대해선 매우 경계하고 탄압하였다.

결국 기독교 농촌활동가들은 농민·여성농민교육과 활동의 목적이 전도와 계몽이라는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선 일제와 크게 마찰이 없어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정책과 크게 배치되는 바가 없었으므로 조직적으로 일제가 체제내로 포섭하여 독자적 활동의 필요성이 부정되어도 일제와 맞설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또 실제 거의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그리하여 1937년에 가면 일제의 압력과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총회 농촌부가 폐지되고 자율적인 사회운동이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민족적 색채가 남아 있는 소수와 폐쇄적 기독교 교리를 존중하는 파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일제에게 굴복하여 일제의 정신총동원연맹이나 총력연맹 등에 편제되어 민중들을 기만하고 일제에 협조하였다.

뚜렷한 사상적 경향을 띠지 않은 부녀회·부인회 등 이름의 여성단체들이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 각지에서 무수히 생겨났다. 이러한 조직들은 결국 저축·공동경작·탁아소 운영 등의 시도를 통해 경제적 궁핍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자율적 활동은 일제의 정책 의도를 실현시켜줄 뿐 여성해방과 관련된 의식이나 활동으로 나아가는데 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부인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이 시기 일제의 체제내화 공작에 말려 들어간 사례는 무수하다. 그 중 1928년 조직된 전남 순천 월계리 부녀회도 그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활동 자체는 여느 부인회와 마찬가지로 공동경작·양잠 등 공동작업과 색의장려·야학활동이 주된 것이었다. 그런데 관청과 연결되면서 부녀회란 이름이 진흥회로 바뀌고, 모범진흥회로 지정되었으며 총독부로부터 사업보조금을 받는 단체가 되어 본격적으로 농촌진흥운동에 참가하였다.

조직되지 않은 여성농민들은 군청·공립보통학교·마을내 농촌진흥회, 민족개량주의자들이 경영하는 야학에서라도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야학은 실로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유포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이어서 여성들의 민족, 계급정신을 마비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봉건적 가족주의나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참가한 여성들에 대하여 악선전을 한 것도 결국 부모의 딸 단속을 강화하라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것이고 여성들을 봉건적 가족 이데올로기인 효녀·효부·열녀라는 규범으로 덮어씌워 일제 지배 하에 두고자 한 것이다. 실제 유교진흥회나 기타 단체에서 주로 하던 효부·열녀 표창이 1930년대 이후에는 직접 일제 관청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