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 2) 제 정당의 통합노력과 양대 정당체제의 성립
  • (1) 조선민족혁명당

(1) 조선민족혁명당

1932년 후반에 들어 독립운동정당들은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통합운동은 1920년대에 이루어졌던 유일당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운동의 재기로 해석된다. 그처럼 다시 통일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에는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에 의한 중국인의 대일 항전의식 고조, 李奉昌·尹奉吉 의거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전환과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미국과 일본, 혹은 소련과 일본 사이의 전쟁 예견 등이 작용하였다.

한국독립운동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맞는 대응책으로 대동단결체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그 근저에는 이 목표가 이루어질 경우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고, 또한 중국의 지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그 결과 1932년 10월 12일에 한국독립당 대표 이유필·송병조·김두봉과 신한독립당 대표 윤기섭·신익희, 조선의열단 대표 한일래·박건웅, 광복단 대표 김규식 등 9명이 모여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514)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13쪽. 이 동맹의 결성은 1920년대 후반에 추구되었던 유일당운동의 연결선상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동맹은 각 단체의 제휴에 불과했고, 따라서 보다 적극적인 투쟁역량 결집을 위한 단일대당 결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 논의가 1933년 3월 1일에 남경에서 열린 2차 대표대회 겸 한국혁명각단체대표자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각 단체의 해체와 단일대당의 결성 및 임시정부의 해산이 제안되었다. 이후 상당한 진통을 거쳐 1935년 6월에 있었던 동맹의 제3회 대회에서 동맹의 발전적 해소와 신당, 즉 민족혁명당 창립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515)朝鮮總督府 高等法院檢事局 思想部,≪思想彙報≫5(1935), 89∼91쪽.
당명이 처음에 민족혁명당·한국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으로 쓰이다가 1937년 1월에 남경에서 개최된 전당대표대회에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결정되었다.

민족혁명당은 1935년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린 신당창립정식회의를 통해 결성되었다.516)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37쪽.
민족혁명당은 창당선언을 통해 신당창당의 역사적 당위성을 밝혔는데 그것은 과거의 분산적 운동과 그 오류를 지적하고 투쟁역량의 결집을 주장한 내용이었다. 즉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예견하면서 “우리민족의 혁명역량을 급속으로 집중·공고하게 하고 중국민족과 절실히 제휴하며, 나아가 우리 독립운동에 동정하는 각 민족국가를 모두 우군으로 인정하고 반일전선의 전략 아래 최후에 승리를 획득할 때까지 희생적으로 분투한다”라고 했다(金正柱,≪朝鮮統治史料≫10, 757쪽).
의열단의 김원봉과 신한독립당의 이청천은 윤봉길의거로 이후 중국의 대단한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잠적중인 김구의 세력에 대응하면서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김구가 이탈한 상태의 한국독립당의 경우는 단일 신당에 대한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지 못하였다. 김두봉·강창제·박창세 등은 신당 참여에 찬성했으나 송병조·조완구·차이석 등은 끝내 반대하였다. 민족혁명당에 참가한 단체들은 7월 25일에 단체를 정리하고 사업·재정·당원 및 소유비품 등을 신당에 인계하였다.

민족혁명당을 구성한 핵심인물은 물론 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창당 2개월 뒤인 1935년 9월에 김원봉의 전권 장악에 반발한 조소앙·박창제 등의 한국독립당 출신들이 탈퇴하여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하고, 이어서 신한독립당 출신의 閔丙吉·조성환·홍진 등도 탈퇴하게 되자, 남은 중심인물은 김원봉 등의 의열단계와 이청천·윤기섭 등의 신한독립당계, 그리고 최동오를 비롯한 조선혁명당계의 인물들이었다.

창당대회에서 선임된 간부는 내무부 겸 선전부장 김두봉, 외무부장 김규식, 군무부장 이청천, 재무부장 윤기섭, 교통부장 이범석, 특무부장 박창세, 감찰부장 양기탁 등이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 등의 세력이 이탈된 뒤, 1937년에 구성된 중앙위원은 김원봉·이청천·윤기섭·成周寔·신익희·윤세주·김상덕·최석순·千炳日·유동열·金弘敍·李景山·鄭八仙·鄭日明 외 2명으로 세 계열의 대표로 구성되었다.517)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01쪽. 민족혁명당은 중앙에 중앙위원회와 7부 및 서기국·군사국·조직국·검사국의 4국으로 구성되는 중앙당부를 두었다. 그리고 1937년 초에 중앙의 7부를 조직부(부장 최석순)·군사부(부장 이청천)·선전부(부장 陳義路)·서기국(총서기 김원봉)의 3부 1국제로 고쳤다. 지부 조직은 처음에 상해지부(지부장 김홍서)·남경지부(지부장 최석순)·만주지부(지부장 김학규)로 구성되었다. 그 뒤 1936년 4월에는 화중·화동·화남·화서·화북지부와 국내외 특별1지부 및 만주의 특별2지부 등 7개 지부로 변경했다.518)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71∼572쪽.

민족혁명당의 이념은 당의와 당강 및 정책 등을 통해 쉽게 드러난다. 그 이념의 대강은 혁명적 수단으로 일제를 물리치고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조소앙의 三均主義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앞서 성립된 한국독립당이나 민족혁명당의 결성 직후에 성립되는 한국국민당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발표된 이념과는 달리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세력은 공산주의 이념을 갖고 있었고, 다만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이를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방략은 당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혁명적 수단’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민족혁명당은 일제의 견제를 피하면서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관을 양성하고 이들을 국내와 만주 그리고 중국내 각지로 파견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인력을 확보하는 방략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1·2·3차의 단계로 특무공작을 전개했다. 제1차 공작은 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군관을 양성하는 것으로 일본의 간섭에 의해 중지되었다. 제2차 공작은 1936년부터 각 당원을 희망에 따라 군사부(부장 이청천)·특무부(부장 이범석)·당무부(부장 김원봉)로 나누어 군사부가 무장군사훈련을, 특무부가 첩보·암살·파괴 활동을, 당무부가 특무부원 배치·당원밀파·선전활동 등을 각각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제3차 공작은 같은 해에 파견된 요원으로 하여금 암살과 파괴활동을 전개하게 하고 또 남경에서 대기중이던 40·50명을 다시 파견하는 일이었다.519)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71쪽. 민족혁명당은 중국국민당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면서 활동했다. 이 당은 蔣介石이 이끄는 藍衣社(중국국민당의 비밀특무기관)와 정보를 교환하고 재정과 무기의 원조를 받았다.

민족혁명당은 대일전선통일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제 정당의 통합운동으로 성립되었지만, 성립 무렵부터 상당한 문제와 한계를 갖고 출발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에 근거한 것이었다. 첫째 독립운동계의 가장 큰 세력이었던 김구 계열과 임시정부를 고수하고자 했던 송병조·조완구 등이 불참한 것이었다. 둘째 통일전선을 이루었으면서도 사상적인 갈등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이었다. 셋째 항일투쟁의 대부분이 중국 국민당정부의 자금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를 둘러싼 실권장악의 투쟁이 논란거리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창당 2개월 뒤인 1935년 9월에 조소앙·박창세 등의 한국독립당 출신들이 탈퇴하여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함으로써 미완성된 단일 신당의 모습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이 현상은 중국의 재정지원을 김원봉이 독점함에 의해 나타났다.520)중국국민당이 남의사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였는데, 당시 남의사는 김원봉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남의사로부터 매월 2천 5백불(원)을 지급 받았고, 기타의 자금 수입도 있었다(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76쪽). 곧이어 신한독립당 계열의 민병길·조성환·홍진 등의 탈퇴로 1936년부터는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및 신한독립당의 잔류 세력만이 남게 된 상황이었다. 더구나 김원봉과 이청천의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재정운용에서 김원봉의 독점, 특히 중국 공산주의자와의 일방적인 교섭 등에 대한 이청천의 불만이 그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 대립이 표면화된 발단은 1936년에 당의 기관지인≪民族革命≫3호에 黨旗 대신 의열단기를 게재했던 사건이었다.521)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77쪽. 이로 말미암아 이청천 세력이 비상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반격을 가하게 되자, 김원봉은 1937년 4월 상순에 간부회의를 열어 이청천·최동오·이광제 등 11명의 핵심인물을 제명시켜 버렸다.

민족혁명당은 1935년 7월에 김구 계열과 임시정부 고수파를 제외하고 성립된 통합 정당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전반 중국 본토에 있어서의 독립운동계에는 독립운동정당이 정착했던 시기였고, 특히 정당의 통합운동이 전개된 시대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이 성립된 4개월 뒤인 1935년 11월에 김구 세력이 한국국민당을 결성함으로써 양대 정당체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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