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3) 동북항일연군내 한인들의 활약과 조국광복회
  • (3) 조국광복회의 결성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산

(3) 조국광복회의 결성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산

코민테른은 1935년의 7차대회에서 식민지 피압박민족 민족해방운동의 지지와 식민지 및 종속국 인민의 해방을 결의했고, 반파시즘 통일전선의 결성을 채택했다. 이러한 방침은 중국공산당의 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공산당은 한민족의 독립쟁취를 지원하기 위해 항일연합군을 조직하는 것은 물론,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중추기관으로서 ‘항일민족혁명당’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752)<中共吉林省委致饒河中心縣委給四軍四團的信-關于建立七軍, 對敵鬪爭的方式及城市工作策略問題的指示>(≪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滙集≫甲 28, 1936), 10쪽. 이에 따라 1936년 초부터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고 조국광복회라는 독립운동 조직이 통일전선 조직체를 표방하며 결성되었다.

한인이 다수를 차지했던 동북항일연군 제2군은 한·중 국경지대와 남만주 일대에서 활발한 투쟁을 벌여 조국광복회가 창건될 기초를 닦았다. 이에 중국공산당 만주조직(동만특별위원회)과 제2군의 주요 간부들은 한인의 자치문제와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 그 산하 대중조직의 결성문제, 그리고 민족별 무장부대와 중공당 하부조직의 편성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일련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즉 항일민족통일전선 방침의 구체적인 정립과정으로서 北湖頭 회의(1936. 2. 5∼6), 迷魂陣 회의(1936년 3월 상순), 東崗 회의(1936년 5월 초)의 결정에 따라753)이러한 일련의 회의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신주백, 앞의 책(1999), 433∼453쪽.
북한측 자료에 따르면 조국광복회는 15일간이나 계속된 동강회의 결과 1936년 5월 5일 창립되었다고 한다. 이 때 발표된 조국광복회<창립선언문>에는 김동명·이동백·呂運亨 세 사람의 이름이 공동 발기인으로 기재되었다. 이에 대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이동백 등 주위 관계자의 권유에 따라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너무 젊은 나이에 회장으로 추대되는 것이 어색해서 金東鳴이란 가명을 썼다고 주장한다.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754)현재 조국광복회의 결성시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즉 1936년 5월 초(5일) 결성되었다고 보는 시각과 1936년 6월 10일 결성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936년 3월 경 벌써 東滿지역 항일투쟁 세력 사이에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의 명칭이 거론되고, 운동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북만지역에서조차 1936년 5월에 이미 “한국독립과 동포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인민통일전선’을 高唱하는 선전문건이 뿌려지고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滿洲國 軍政部 顧問部, 앞의 책, 126·729∼730쪽). 따라서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주도로 1936년 5월 5일 이 조직이 결성된 것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다(장덕순 외, 앞의 책, 100∼109쪽). 한편 이명영·허동찬·서대숙 등 6월 10일 결성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오성륜과 엄수명·이상준이 발기인으로 표
기된<재만한인조국광복회 선언> 문건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백동현은 각 지역마다의 특수한 여건과 상황의 차이에 따른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하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자료를 검토해볼 때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에서 주도한 것이 틀림없으며, 1936년 5월 초 東崗會議 결과 동만에서 먼저 결성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백동현,<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백산학보≫49, 1997, 225∼226쪽). 필자 역시 5월 초 동만지역에서 먼저 결성된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나중에 남만지역에서 1936년 6월 10일 오성륜(전광)·嚴洙明·李相俊(이동광) 등 세 사람의 발기인 명의로 발표된<재만한인조국광복회선언>은 “전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동포는 반드시 일치단결 궐기하여 원수인 왜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을 밝히며 광범한 항일민중의 참여를 촉구하였다.755)조선총독부 고등법원 檢事局 思想部,≪思想彙報≫14(1938), 60∼61쪽.

조국광복회는 먼저 남만주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군 3사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36년 7월 진행된 河里會議 결과 중국공산당 남만특별위원회와 동만특별위원회는 南滿省委員會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2군을 합쳐 제1로군을 결성했으며, 제2군의 3사를 제6사로 개편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가까운 백두산 일대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756)辛珠柏, 앞의 책(1999), 451∼453쪽. 신주백은 1936년 7월 개최된 河里會議결과 조국광복회가 실제로 공식 결성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제1로군 6사는 사실상 한민족의 해방을 위한 독립군적 성격과 역할이 부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만주 독립군의 오랜 이론적 기반이자 투쟁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해외독립운동 기지건설론’ 및 ‘독립전쟁론’과 일맥 상통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757)백동현, 앞의 글, 247쪽. 동북항일연군 6사는 유격근거지를 세우는 한편 漢族을 대상으로는 항일구국회, 한인을 대상으로는 (조선)조국광복회라는 명칭의 대중조직건립을 추진하였다.758)徐學新·王德貴 編寫,≪吉林文史資料≫21輯(東北抗日聯軍 第一軍簡史)(長春:政協吉林省委員會 文史資料硏究委員會, 1987), 98∼99쪽.

이렇게 성립한 조국광복회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일제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한인의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한인의 참다운 자치를 실현할 것,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울수 있는 혁명적 군대를 조직할 것” 등을 주장하는 10대 강령을 발표하고 군사활동뿐만 아니라 국내 민중과도 연계된 정치활동에도 적극 노력하였다.759)장덕순 외, 앞의 책, 109∼110쪽.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만 조선혁명당의 강령은 물론 중국관내의 南京에서 1935년 7월 성립한 민족혁명당 강령과 매우 유사하며, 1941년 11월에 발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비교해도 비슷한 이념을 표방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한국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일본 强盜의 통치를 顚覆하고 진정한 한국의 독립적 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② 韓·中 민족의 친밀한 연합으로 일본 및 走狗 滿洲國을 전복하고 중·한 인민이 자기가 선거한 혁명정부를 설립하여 중국 영토에 거주하는 韓人의 진정한 자치를 실행할 것.
③ 일본 군대·헌병·경찰 및 그 走狗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일본군대를 우리 애국지사로 豹變·원조하며 전인민의 무장으로 한국인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를 조직할 것.
④ 일본의 모든 기업·은행·철도·해상의 선박·농장·수리기관·매국적 친일분자의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 경비에 소비하며, 일부 빈곤한 동포를 구제할 것.
⑤ 일본 및 그 走狗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동시에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농·상업을 障害없이 발전시킬 것.
⑥ 언론·출판·사상·집회·결사의 자유를 戰取하고, 왜놈의 봉건사상을 장려하는 白地恐怖의 실현에 반대하며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⑦ 양반·상민 및 기타 불평등의 排除, 남녀·민족·종교·교육 등의 차별을 하지 않으며, 일률적 평등과 婦女의 사회상의 대우를 提議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할 것.
⑧ 노예·동화교육에 반대하고 우리말과 글을 학습하며 의무적 免費敎育을 실행할 것.
⑨ 8시간 노동제 실행, 노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노동법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노동자의 보험법을 실행하여 실업하고 있는 노동대중을 구제할 것.
⑩ 한국민족에 대하여 평등하게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하게 연락하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선의·중립을 표시하는 국가 및 민족과 동지적 친선을 유지할 것(姜德相 編,≪現代史資料-朝鮮≫3, 東京:みすず書房, 1976, 265∼266쪽).
현재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의 原案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위의 내용이 당시 발표된 내용과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에 崔昌益이 쓴≪조선민족해방운동과 김일성장군≫, 桂奉瑀가 1952년에 쓴≪조선역사≫3(개정판, 164∼165쪽) 등에 모두 위의 내용과 흡사한 내용이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의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1981년에 간행한≪조선전사≫19(현대편), 100∼101쪽에도 ‘한국민족’ 대신 ‘조선민족’으로 표현된 것 외에는 위의 내용 거의 그대로 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국광복회는 창설 직후 조직확대사업을 전개하여 압록강 건너편 장백현 일대와 국내의 함경남도 북부 및 평안북도 북부지방, 그리고 함흥·흥남·원산 등의 도시에도 여러 지부조직을 갖추었다.

또 국내로 파견된 權永壁·李悌淳 등은 朴達·朴金喆 등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연계하여 1937년 1월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국광복회 강령을 수용하고 짧은 기간에 함경남도 갑산군 등지에 각종의 반일청년동맹·반일그룹·반일부인그룹·반일회·농민조합·결사대·야학회 등 35개의 하부 비밀조직을 형성하는 놀라운 발전을 보았다.760)辛珠柏, 앞의 책(1999), 471쪽.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준식,<항일무장투쟁과 당건설운동-조선민족해방동맹을 중심으로->(≪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 427∼479쪽. 이 숫자는 일제측에 탐지된 하부조직만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관련 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조국광복회에는 남만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조선혁명군의 일부 대원들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천도교 세력과도 제휴하였으며, 朴寅鎭 등 지방 천도교지도자를 핵심세력으로 수용하는 데 성공했다.761)이 사실은 다음의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천도 상급령수 모씨 우리 광복회 대표를 친히 방문’이라는 題下에 “… 대중적 지반을 가지고 있는 천도교 ××위원 모씨는 끓어넘치는 애국의 열정을 가지고 우리 대표 김사령 일성동지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 전기 모씨는 개인적으로 우리 광복회 정강과 일체의 주장에 대하여 찬동을 표시하고 아울러 천도교 청년당원 … 을 조선독립전선에 출동시킬 의향을 명시하고 장차 우리 광복회와의 보다 긴밀한 련계를 취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고 한다”(≪3·1월간≫창간호, 1936;리응필,<우리 당 출판물의 혁명적 전통>,≪력사과학≫1967년 4호, 45쪽에서 재인용). 이 밖에 박인진에 대해 우호적이며 상세한 내용의 회고도 있다. 뿐만 아니라 천도교 중앙교단과도 연계를 시도하는 등 폭넓은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여 광범위한 항일대중을 망라하였다.762)천도교 세력의 조국광복회 참여문제에 대해서는 成周鉉,<1930년대 천도교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관한 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25, 2000), 168∼218쪽. 1936년 11월 경 백두산 부근의 밀영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박인진은 그해 12월 24일 서울로 가서 최린을 만나 조국광복회 결성에 대해 설명하고 참가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김일성 등의 주의는 천도교의 주의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심국보,<천도교와 조국광복회-박인진 도정의 항일활동을 중심으로>,≪新人間≫545, 1995, 35쪽). 이로써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이 연계된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이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항일연군 제1로군 6사의 보천보 진입전투를 계기로 일제는 한반도 북동부 지역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자행하여 항일연군 및 조국광복회 관계자 739명을 검거하였다.763)체포된 주요인사들에 대한 판결문 내용은<惠山事件 判決書>(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6, 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543∼841쪽. 이 때문에 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에 관계된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고 산하조직의 대부분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39년 6월 북만주 지역에서도 “조선민족광복회”란 이름으로 조국광복회 조직 결성이 추진되기도 했다.764)吉林省檔案館 編譯, 앞의 책, 103∼104쪽.

이후에도 항일연군 제2·3방면군은 함경북도 무산 진입전투(1939년 5월), 일본군과 만주국군 100여 명을 섬멸한 안도현 大沙河 전투(같은 해 8월), 악명높던 ‘마에다(前田) 토벌대’ 120여 명을 궤멸시킨 화룡현 紅旗河 전투(1940년 3월) 등을 전개하여 최후까지 적에 큰 손실을 주었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대한 일본 군경 및 만주국군의 토벌도 강화되어 마침내 1940년 2월 1로군 사령관 양정우가 전사하고 만주지역의 잔존 항일연군도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그 뒤 만주지방에서 조직적 군사활동이 어려워진 잔존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겨울부터 동·북만을 거쳐 소련(연해주)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소련측의 도움을 받아 南野營과 북야영으로 불리우는 거점조직을 세웠으나, 1942년 7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제되었다. 교도려는 소련군 산하 국제홍군 제88특별여단이라고도 했다. 이 무렵 이들의 전체 대원은 600여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인은 140·180여 명이 있었다.765)와다 하루끼, 이종석 옮김,≪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작과 비평사, 1992), 271·272·277쪽.
강만길, 앞의 책, 104쪽.
기광서는 100∼190여 명으로 파악했는데, 1945년 8월 25일 경에는 103명이었다고 한다(기광서,<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역사와 현실≫28, 1998, 266·280쪽).
구체적 대원명단과 이력은 楊昭全·李鐵環 編, 앞의 책, 936·972쪽.

대부분의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은 1940년대 초반 소련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김책과 허형식·朴吉松 등은 소련으로 들어오라는 상부의 지시도 거부한 채 북만주 지방에서 1942∼1943년까지 완강하게 투쟁을 계속하였다.766)당시 허형식의 입장과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장세윤,<동북항일연군과 허형식>(≪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역사비평사, 2000), 206∼259쪽. 소련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내 한인 대원들은 만주에 소부대를 파견하여 정찰활동을 전개하고 철도와 도로를 파괴하는 등 소규모 전투도 간헐적으로 벌였다. 이들은 해방 직전까지 꾸준히 소규모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조국광복회 재건활동을 전개하여 일제 당국을 놀라게 하였다. 실제로 1943년 봄 姜渭龍 등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소속 부대원 16명은 소부대 활동을 전개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활동을 전개하였다.767)辛珠柏, 앞의 책(1999), 465∼466쪽. 이 때 결성된 開山屯지역 조국광복회 조직은 1944년 말 강위만(강위룡의 형)·김동길 등 30여 명의 관계자가 체포됨으로써 붕괴되고 말았다.768)리광인,<시련을 이겨낸 사람들>(≪결전≫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4, 북경:민족출판사, 1991), 289∼290쪽. 또 중국공산당 조직과 별개로 추진된 ‘東滿省委員會 撫松支部’사건은 이 시기 재만한인들의 끈질긴 조국독립운동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유격대원이었던 琴學貴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동만성위원회 서기로 오인한 李光山(1892년생)은 한인 金光洙, 중국인 王鳳山 등과 소위 ‘동만성위 무송지부’를 조직하여 조선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2년 5월 말까지 61명(한인 59명, 중국인 2명)이 체포되어 실패하고 말았다.769)吉林省檔案館 編譯, 앞의 책, 328∼332쪽. 그러나 이런 사례를 통해 무장투쟁 세력이 끊임없이 대중화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중조직인 조국광복회 관련 하부조직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하여 꾸준히 활동을 전개하였던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1945년 8월 초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로 소·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려의 일부 한인들은 작전에 참가하였다.770)교도려 소속 일부 한국인들의 참전 사실은 일본인의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증명된다.
“(1945년) 8월 8일 오후 11시 50분 조선인 一團 약 80명이 소련군과 함께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土里에 來襲했다. 이곳은 소련 영토를 指呼之間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土里의 경찰관 주재소가 습격받았다. 소련군은 土里駐在所의 경찰관과 교전하여 경계중인 金澤巡査 외에 警官 2명을 사살하고 …”(森田芳夫,≪朝鮮終戰の記錄≫, 東京:巖南堂書店, 1964, 29쪽).
그러나 다수의 한인 대원들은 직접 독립전쟁(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해 9월 경 소련군을 따라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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