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 (1)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가. 1930년 전후 하와이 한인사회의 동향과 독립운동 단체 결성

일제하 한국 민족은 민족적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아울러 한국 민족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민족 내부의 단결과 역량결집에도 부단히 노력하였다. 일제시기 독립이라는 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러야할 선결과제는 바로 민족 내부의 통합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는 외견상 두드러진 독립운동은 전개하지 못했지만, ‘광복’을 위해 민족 내부의 역량을 축적하고 결집시키는데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의 통일운동은 하와이뿐만 아니라 북미지역과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진영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기에,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운동은 단순히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역적인 특성 속에서만 고찰할 것이 아니다.771)1930년대 미주지역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홍선표,<1930년대 재미한인의 통일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1996).
―――,<이승만의 통일운동:-1930년 하와이 동지미포대표회를 전후로->(≪한국독립운동사연구≫11, 1997).
―――,<1930년대 후반 하와이 한인의 통일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2, 1998.
이 시기 활발히 전개되었던 한민족 전체의 통일전선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3·1운동으로 뜨거워진 독립운동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자, 1920년대 미주 한인사회는 분열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와이 국민회가 교민단으로 전환하여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미주 한인사회는 북미와 하와이로 분리되었고 하와이 내부 또한 여러 세력이 분열하고 있었다. 1920년대 하와이의 한인사회는 동지회와 교민단을 장악하고 있던 李承晩측 세력과 朴容萬을 지지하는 大朝鮮獨立團의 세력이 중심을 이루었다. 두 세력은 1910년대부터 쌓아온 좋지 않은 악감정으로 서로 화합하기 힘든 상대였다. 이밖에 하와이에는 두 세력에 비해 미약하였지만 점차 두 세력의 중개자 역할을 할만큼 영향력이 증대하는 중립측 세력이 있었다.

가) 대한민족통일촉진회의 결성

1920년대의 하와이 한인사회가 점차 분열상태로 확대되자 여기에 대응한 통일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에 일어난 대표적인 통일운동의 움직임은 1928년 2월 16일 29명의 한인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민족통일촉성회(이하 ‘촉성회’로 약함)이다.772)≪新韓民報≫, 1928년 3월 15일, 하와이<한민족 통일을 위하여>. 1928년 3월 이 단체는 166명이 연명한<한국민족통일촉성선언서>을 대내외에 발표하고 한민족이 통일해서 독립된 국가건설을 해야 한다는 3대 강령을 제정하였다.773)≪新韓民報≫, 1928년 5월 24일,<한민족통일촉성회 선언서를 讀하고>. 촉성회 조직은 서무부(부장 최창덕)·선전부(부장 민찬호)·의사부(부장 이복기)와 집행위원으로 구성하였다.774)≪新韓民報≫, 1928년 5월 3일, 하와이<합성시대를 다시 만난 한족통일독립당촉성회>. 집행위원의 인적 구성을 보면 대조선독립단 4인, 교민단 6인, 중립측 10인으로 되어 있어,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요 세력들이 촉성회에 골고루 참여하여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촉성회는 1928년 5월 21일 호놀룰루(Honolulu)에서 개최한 제1차 대회 이후 뚜렷한 활동도 없이 해산되었다. 주요 원인은 먼저 지나치게 명분론에 치우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운동의 방식이 결여되어 있던 점과 1928년 10월 박용만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촉성회에 참가한 대조선독립단 단원들이 구심점을 잃고 크게 위축된 점을 들 수 있다. 촉성회 결성은 1930년대 이후 한인협회를 결성하고 이승만이 통일운동을 추진하는데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 한인협회의 결성

1930년이 되자 하와이 한인사회는 1929년 11월 3일 국내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이 북미를 비롯한 하와이에 전파되면서 통일운동에 대한 열기가 되살아났다. 이 때문에 하와이에서는 국내 독립운동을 응원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한인들이 서로 결집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775)≪태평양주보≫, 1931년 5월 9일, 사설. 이런 열기로 1930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서 과거 촉성회에 참여했던 대조선독립단과 중립측 인사들이 통일된 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韓人協會를 발기하였다. 발기자들은 “임시정부로 집중시키는 것이 곧 독립의 정신이요 민족통일의 경로”임을 주장하는 취지서와 모든 민족운동을 임정으로 집중·통일하는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1930년 2월 6일 발표된 한인협회 조직은 위원제로서, 집행위원장 趙鏞夏, 재무 김윤배, 서기 김진호가 담당하였다.776)위와 같음. 또한 임시위원은 최두욱·조광원·이원순·신국겸·정운서·박상하·이상호·강영효·박종수·정원명·김리제였고, 그외 현순과 이정근도 한인협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인협회는 처음 회원이 40여 명으로 출발하여 두 달도 채 못되어 80여 명으로 확대하였다.777)≪新韓民報≫, 1930년 4월 3일. 한인협회는 결성이후≪韓人協會公報≫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모색했으나 회를 주도하던 조용하가 하와이를 떠나 일본으로 가면서 회의 구심점을 잃은데다 이승만이 새로운 통일운동을 주도하면서 해소되었다.

다) 한인자치회의 결성

한인협회 결성으로 나타난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운동 바람은 1930년 3월 9일 가와이(Kawaii)島 거류 한인 150여 명이 韓人自治會를 결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인자치회의 主旨는 ‘自治互助’·‘革命應援’·‘敎育獎勵’에 두었고, 전 민족의 통일을 촉진하는 것과 대일항전을 위한 혁명군을 신속히 양성하는데 한인협회와 그 뜻을 같이하였다.778)≪韓人協會公報≫제5호, 1930년 3월 20일,<가와도소식>. 자치회의 조직은 회장 이홍기, 부회장 김상호, 서기 한태경, 재무 정호영, 총무 조치삼 등이다. 이후 한인자치회는 이승만이 전개한 통일운동의 派爭을 계기로 1931년 4월 가와이 한인단합회로 회명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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