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 (3) 1940년대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가. 하와이 한인사회의 연합활동과 독립운동

통일운동의 실패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연합행동을 보인 때는 1940년이 되면서부터다. 이 때가 되면 유럽에서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확대되어 미국의 참전분위기가 형성된다. 루즈벨트(Roosevelt, Theodore)대통령은 1940년 5월 26일 시국연설에서 현 전쟁을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고 국방력 건설과 전쟁난민을 위한 적십자 구제금기부를 미국민들에게 요청하는 등 大戰참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838)≪太平洋週報≫, 1940년 6월 1일,<국방에 대한 대통령연설>. 아울러 미국내에서는 장차 미일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여론도 고조되고 있었다.839)≪太平洋週報≫, 1940년 8월 3일,<1년래 미국 참전을 선언>·10월 12일,<미일충돌이 일주일내에 날 듯>참조. 특히 하와이가 미일전쟁의 첫 발생지가 될 지 모른다는 우려가 하와이내에서 고조되고 있는 마당에 하와이 한인들은 이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당시 하와이는 미국정부가 하와이에 대한 국방설비를 한창 준비하는 중이어서 거류민 사회 전체가 국방준비를 대대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동지회 외교원 이원순은<이 때 한인은 어떻게 할까>라는 글에서 이번 시국을 계기로 하와이 한인들의 공동행동을 요구하였다.840)≪太平洋週報≫, 1940년 10월 12일.

이러한 공동보조의 분위기 속에 하와이 한인들은 1940년 10월 13일 6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연합한인위원회(‘한인연합위원회’라고도 불리움, 이하 ‘한인위원회’로 약함)를 조직하였다.841)재미한족연합위원회 편,≪해방조선≫(나성과 하와이, 1948), 149쪽. 10월 20일 발표한<연합한인위원선언서>를 보면 연합한인위원회는 미국의 국방활동을 전적으로 후원할 목적으로 조직되었지만 이 후원활동을 통해 한민족이 목표하는 독립과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도모하려 하였다.

한인위원회에 대해선 자세한 자료가 없지만 조직은 하와이내 주요 단체 6개 대표 20명으로 구성하였다.842)참가단체와 대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부인구제회(동지회):김순연·손노디·이유실
· 부인구제회(국민회):곽명숙·김차순·김매들린
· 중한민중동맹회[단]:정두옥·차신호·손창희·김영선
· 대조선독립단:정태영·박성달·현순·이명선
· 동지회:손승운·이원순·안현경·도진호
· 국민회:안원규·김원용·김태원·김현구
(≪太平洋週報≫, 1940년 10월 29일,<각단체 대표대회>).
10월 20일 주요 임원을 비롯하여 관리부·선전부·구호부·훈련부·조사부·재정부 등 6부의 임원을 선정하였다. 인원선정은 참가한 단체 모두에게 골고루 안배되었다.

한인위원회는 비록 미국의 대전참전 분위기를 계기로 미국방원조라는 대의명분 속에 이루어졌으나 1930년대 하와이 한인들이 지속적으로 전개한 통일운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한인위원회의 구체적인 활동은 자료상의 한계로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이후 해외한족대회 이후 미국방후원 사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 넘어감에 따라 1941년 5월 경 해소되었다.

한인위원회 결성을 계기로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연합적으로 추진되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광복군조직 계획이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한인사회에 알려지면서 하와이 한인사회는 북미와 마찬가지로 광복군후원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하와이에서 전개된 광복군후원활동은 자료상의 한계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41년 제단체 연합으로 거행된 3·1절 기념식을 통해 하와이 한인사회는 전례 없는 대동단결력을 보임과 동시에 광복군후원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843)3·1절 연합행사를 통해 거둔 광복후원금이 2,000여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하와이 한인들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당시 3·1절 경축위원장이던 안원규는 3월 10일 각 단체에 보낸<윤첩>에서 광복군후원활동을 상설화할 것을 요청하였다.844)≪新韓民報≫, 1941년 3월 27일,<윤첩>. 그 결과 3월 13일 국민회·동지회가 연합한 대한광복군후원금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광복군후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하와이 한인사회는 연합한인위원회와 광복군후원활동을 통해 단결력을 대외에 과시하면서 독립운동의 열기를 이어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 북미 국민회와 함께 해외한족대회를 준비하는데 좋은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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