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3. 임시정부로의 통일전선 형성
  • 1) 좌익진영의 임시정부 참여

1) 좌익진영의 임시정부 참여

1940년대 중국관내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성과의 하나는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 좌우 독립운동세력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각 혁명단체와 인민의 합법적 선거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고, 국토와 인민이 없는 상황에서 政權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953)秋憲樹,≪資料韓國獨立運動≫2(연세대 출판부, 1972), 211쪽. 이런 이유로 임시정부에 대해 不關主義 노선을 고수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좌익진영의 세력들이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좌익진영이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태평양전쟁 발발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요한 요인으로 들 수 있다. 1941년 12월 8일 발발한 미일간의 전쟁은 대일항전을 전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고, 이를 위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필요성이 절박해진 것이다.

중경에 정착한 후 임시정부가 세력을 결집한 반면, 좌익진영은 그 세력이 분열되었다는 것도 적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족진영 세력들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하고 있었지만, 좌익진영은 그 기초세력인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화북으로 이동하여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한다고 하면, 그것은 임시정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중국측의 지원방향이 임시정부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도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중국측은 1930년대 이래 金九와 金元鳳을 중심으로 한 두 개의 창구를 통해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954)朱家驊,<나와 韓國과의 關係 槪要>(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6), 625쪽. 그런데 중국에서 지원창구를 단일화시키고자 하였다. 1941년 중국 외교부장 郭泰祺가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문제를 거론하면서, 지원창구를 임시정부로 단일화한다는 방침을 표명한 것이다.955)韓詩俊,<1940년대 전반기 독립운동의 특성>(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한국독립운동사연구≫8, 1994), 450쪽.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좌익진영으로 하여금 임시정부에 참여하도록 작용하였다. 좌익진영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선도한 것은 조선민족해방동맹이었다. 金星淑이 주도하던 조선민족해방동맹은 1941년 12월 1일 “反日革命力量을 임시정부로 집중시켜 전민족 총단결을 이루자”는 내용의<擁護韓國臨時政府宣言>을 발표,956)朝鮮民族解放同盟 中央書記局,<擁護韓國臨時政府宣言>(素昻文類 610). 임시정부 참여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뒤를 이어 조선민족혁명당도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개최된 제6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그 동안 임시정부에 대해 고수해 왔던 不關主義 노선을 포기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957)<第六屆代表大會宣言>(秋憲樹,≪資料韓國獨立運動≫2), 204∼211쪽.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임시정부로 결집하자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리고 1942년 3·1절을 맞아 발표한<敬告中國同胞書>를 통해 “임시정부는 각 혁명집단을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조선혁명의 최고기구로 할 것”과 임시정부에서 이들의 참여에 대한 조처를 강구해 주도록 요구하였다.958)秋憲樹,≪資料韓國獨立運動≫3, 110∼112쪽.

이로써 좌익진영의 임시정부 참여문제가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그 절차나 과정에 있어 의견이 같지 않았다. 좌익진영에서는 ‘先정치통일 後군사통일’을 주장하였고, 임시정부측에서는 ‘先군사통일 後정치통일’을 주장한 것이다. 통일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차이로 좌익진영의 임시정부 참여는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합편을 결정함으로써, 군사통일이 먼저 이루어졌다.

군사통일에 이어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적으로도 통일을 이루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2년 8월<임시의정원 의원 선거규정>을 개정,959)韓詩俊 편,≪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국가보훈처, 1999), 389∼391쪽. 좌익진영의 인사들도 의정원 의원에 선출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해 10월 20∼23일에 걸쳐 의정원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새로이 23명의 의원이 보선되었는데, 그 중 김원봉·金尙德 등 조선민족혁명당 인사 10명을 비롯하여 柳子明 등 조선혁명자연맹 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朴健雄·金在浩) 등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의원에 선출된 것이다.96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1975), 963∼964쪽. 이들 좌익진영의 의원들은 10월 25일 개회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 좌우세력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통일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좌우 양진영의 정치통일도 이루어졌다. 그 형식은 좌우 양진영의 각 정당 및 단체들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좌익진영 인사들이 의정원에 참여하면서 의정원 의원의 증강은 물론이고 임시의정원 운영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종래 23명이었던 의원수가 두 배인 46명으로 대폭 확대된 것이다. 그리고 의정원의 운영형태도 한국독립당의 일당체제에서 양당체제로 변화되었다. 전체 의원 46명 중 한국독립당이 29명으로 62%를,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과 무소속이 17명으로 38%를 차지하고 있다.961)韓詩俊,<重慶時代 臨時政府의 活動>(≪仁荷史學≫3, 1995), 391쪽. 한국독립당과 좌익진영이 의정원에서 양대 세력을 이루면서, 각각 여당과 야당으로 역할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당체제의 성립과 이에 의한 의정원의 운영은 의정원 설립 이래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한국의 정당발달 및 정당정치의 기원을 이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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