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3. 임시정부로의 통일전선 형성
  • 3)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통일운동

3)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통일운동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한 후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통일을 모색하였다. 당시 독립운동전선은 중경의 임시정부와 더불어 延安을 중심으로 한 朝鮮獨立同盟과 朝鮮義勇軍, 그리고 국내의 朝鮮建國同盟이 주요 세력을 형성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들과의 통일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에서도 독립동맹과는 서신과 대표 파견을 통해 상당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은 지역적 기반이나 정치적 이념이 달랐지만, 그 실체를 서로 인정하며 존중하고 있었다. 1941년 10월 연안에서 개최된 東方各民族反파쇼大會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명예주석단에 추대한 것이나, 독립동맹 晉西北分盟 성립대회에서 김구의 초상화를 孫文·蔣介石·毛澤東의 것과 함께 대회장에 내걸었다는 것이966)염인호,≪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나남출판, 2001), 154∼155쪽. 그것의 일단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독립동맹은 임시정부에 대해 대립적·경쟁적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강령에 “본 동맹은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지방단체”로 명시한 것이 그것이다.967)<華北朝鮮獨立同盟綱領>(金正明,≪朝鮮獨立運動≫5), 992∼993쪽. 독립동맹이 자신의 위상을 ‘하나의 지방단체’로 자임한 것은 중경의 임시정부를 민족운동의 중앙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임시정부와 독립동맹 사이에는 지속적인 연락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독립동맹의 간부인 金學武가 중경과 연안을 오가며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독립동맹 위원장 金枓奉의 서신연락을 담당하였다고 한다.968)韓洪九,<華北朝鮮獨立同盟의 조직과 활동>(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8), 67쪽. 조직적인 연락체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인편을 통해 상호간에 연락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외에 중경에 있던 민족혁명당의 김원봉도 연안의 김두봉·武亭과 별도의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969)鄭秉峻,<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민족통일전선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576쪽.

이러한 상호간의 신뢰와 연락에 기초하여 임시정부는 독립동맹과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좌익세력이 참여한 이후 임시정부가 대내적으로 추진한 과제의 하나는 민족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일이었고, 이를 위한 방안들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확대 개조,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 5당 통일회의 등의 논의가 바로 그것이었다.970)鄭秉峻, 위의 글, 563∼573쪽.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연안의 독립동맹, 국내의 건국동맹 등과의 통일문제가 제기되었다.

임시정부는 1944년에 들어와 독립동맹과의 통일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44년 3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독립동맹 위원장인 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그러한 시도였다. 이 서신에서 “老身이 一次赴延하면 中韓兩方面이 歡迎할 可望이 있겠는지”라 하여,971)당시의 서신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1948년 2월 김구가 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1944년에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의 내용을 회상하고 있다(<金九 金奎植이 金枓奉에게 보낸 서신>, 대한매일신보사,≪白凡金九全集≫8, 1999, 721∼726쪽). 김구는 자신이 직접 연안에 갈 뜻을 밝히고 있다. 김구가 연안에 가고자 한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의 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동맹측에서도 통일전선에 대한 희망을 표시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가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을 때, 독립동맹은 이를 축하하면서 “일체의 혁명세력이 모두 완전히 통일되고 단결하여 대규모의 항일투쟁을 전개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이다.97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8, 198∼199쪽. 이것이 김구가 제안한 연안행에 대한 독립동맹측의 화답이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양측이 모두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1944년 말에 이르면 통일에 대한 논의는 좀더 구체화된 단계로 발전하였던 것 같다. 1944년 10월 16일 김두봉이 김구에게 보낸 서신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김두봉은 김구의 연안행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지역·파벌을 불문하고 誠心團結할 것과 서로 연락을 취하여 압록강에서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면 자신이 나서서 알선해보겠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973)대한매일신보사,≪白凡金九全集≫8, 722쪽.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이 압록강에서 만나 군대를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논의가 구체화되자 임시정부는 연안으로 대표를 보냈다. 연안에 파견될 인사로는 국무위원 장건상이 선임되었고, 그는 1945년 5월 서안을 거쳐 연안에 도착하였다.974)鄭秉峻, 앞의 글, 578쪽. 장건상은 연안에서 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을 비롯한 간부들을 만났다. 양측의 제안이나 교섭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건상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김두봉을 만나 좌우 통일전선을 중경에서 결성하자고 제의했더니 찬성해요. 자기가 중경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다른 간부들도 모두 찬성이었어요. 그 때는 일제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을 때였으니까 우리가 하루빨리 뭉쳐 해방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있던 때였습니다(李庭植 면담, 金學俊 편집 해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1988, 211쪽).

단편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임시정부와 독립동맹 사이에는 중경에 모여 통일전선문제를 협의하자는 데 합의를 이루었고, 김두봉 자신이 중경으로 가서 이 문제를 협의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경에서의 회의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일제의 패망소식이 먼저 전해진 것이다. 즉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이 중경에 모여 회의를 개최한다는데 합의를 이루었지만, 그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연안의 독립동맹과 더불어 임시정부는 국내와도 긴밀한 연계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1944년 10월 3일 국내비밀공작을 진행하기 위하여 주석이 주관하는 國內工作委員會를 설치하기로 결의한 것으로 보면,975)<國內工作委員會設置案>(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1, 527쪽). 적어도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연계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國內工作員을 파견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白昌燮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동의를 얻어 1945년 4월 국내에 잠입하였다는 증언이 있고,976)鄭秉峻, 앞의 글, 582쪽. 文德鴻은 국내공작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부산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977)鮮于鎭 선생의 증언(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국내공작원으로 파견된 사실을 보여주는 文德鴻의 사진이 소장되어 있다). 아직 구체적인 실상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와의 연계를 위한 기구를 설치하고, 공작원들을 국내로 파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국내와 연계하려는 노력을 추진한 것과 더불어, 국내에서도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도모하고 있었다. 1944년 8월 呂運亨의 주도로 결성된 朝鮮建國同盟이 그러한 단체였다. 건국동맹은 북만주·북경·연안 등 중국 여러 지역에 연락원들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락원들을 통해 건국동맹은 화북의 독립동맹과 연계를 맺는 한편, 임시정부와도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말 “重慶 臨時政府 요인에게 국내사정을 전달하고 내외가 상응하여 協同戰線을 형성할 연락을 하기 위하여 崔謹愚를 파견하였는데”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978)李萬珪,≪呂運亨先生鬪爭史≫(民主文化社, 1946), 173쪽.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위해 건국동맹은 최근우를 북경에 파견하였지만, 임시정부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연안의 독립동맹, 국내의 건국동맹과 통일 및 연계를 추진하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노력은 일제의 패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유효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지만, 이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고, 이를 배경으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통일을 추진하였다는 점이다. 1940년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상호 통일을 이루려는 노력과 시도를 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향후 민족통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주요한 민족적 자산이자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韓詩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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