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2. 민족교육의 정비
  • 1) 문화정치와 교육실태

1) 문화정치와 교육실태

 총독부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그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종래 총독의 임용이 무관에 한정되었던 것을 바꿔 그 제한을 완전히 없애고, 재래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여 보통경찰제도를 채택하고, 관리·교원 등의 제복에 착용하던 대검을 폐지하고-이로써 총독정치의 기본을 순수한 문치주의로 하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시정상의 강령은 ①치안의 유지, ②민의의 창달, ③행정의 쇄신, ④국민생활의 안정, ⑤문화 및 복리의 증진 등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일시동인의 聖意(천왕의 의지)에 기초하여 공명정대한 정치를 행하고 선량한 민중을 애호함과 동시에 다만, 국헌에 반항하고 병합의 정신에 어긋나는 등의 불령배에 대해서는 추호도 가차없이 단속하는 방침으로 나간다고 하였다.008)朝鮮總督府,≪施政25年史≫(1935), 314∼315쪽. 이렇듯 ‘순수한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첫 번째로 ‘치안유지’를 내걸고, ‘합병의 정신’, 즉 한국을 식민지로서 지배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희구하는 것은 반항하는 불령분자로 보아 “추호도 가차없이 단속한다”는 식민지 지배자의 의도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통치 실상을 보면 그 기만성과 식민지 지배의 본질이 확실해진다.

 우선 관제개혁에 의해 총독은 형식상 종래와는 다르게 문무관 어느 쪽에서도 임용한다고 했지만, 일제 말까지 모두 무관이었고 문관이었던 예는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순수한 문치주의’였다.

 또한 문화정치기의 통치방식은 무단통치기의 그것과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 않았고 보다 교묘하게 강화되어진 것이었다. 다른 제 개혁도 행해졌지만, 그 주된 내용은 소위 ‘내선융화’를 내걸음과 동시에 한국인의 일부를 회유하여 이들을 식민통치에 봉사시키는 것이었다. 중추원(총독의 자문기관)에 많은 한국인을 참가시키고, 또 참여관제도(도지사의 자문기관으로 한국인 참가)를 활용하는 것 등과 함께 소위 ‘민의창달’을 표방하면서 지방제도 개정이 행해졌다.009)渡部學 저, 김성환 역,≪한국근대사≫(동녁, 1984), 146쪽. 이에 의해서 도평의회·부(시)·면(촌)협의회 등이 설치되어 극히 제한적이지만 어쨌든 선거가 행해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도지사·부윤(시장)·면장(촌장)의 자문기관이었다. 그 선임도 도평의회는 실질적으로는 총독의 임명에 의한 것이었고, 부·면 협의회는 선거제였지만 여러 가지 府稅나 面賦課稅를 5원 이상 납부하는 사람만이 유권자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유권자는 1920년에 府·面을 합쳐서 일본인이 7,650명, 한국인이 6,346명에 불과하여 한국의 총인구 1,678만 명 중 극히 일부였고, 특히 한국인 인구 중에서 한국인 유권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도평의회의원의 1/3은 총독이 임명, 그 외는 부면협의회원 중에서 총독이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당국을 칭송하는 자를 위한 약간 은급을 주는 정책적 기관에 그치고 말아 교육의 근본방침을 정할 때에도, 산업의 대방침을 세울 때에도, 지조를 일시에 3할이나 올린 때에도 단 하나의 의견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개선은 일종의 광고에 불과”한 유명무실한 실효 없는 무용지물로 끝났던 것이다.010)≪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

 이 시기에는 식민지 지배자측으로부터의 ‘교육의 보급과 개선’도 행해졌다. 한국에는 일본인 아동만을 위한 소·중학교도 있었지만 이것에 대응하는 것으로 별도의 한국인 아동을 위한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및 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있었다. 공립보통학교에 대해서 보면 1921년의 675개교, 14만 9,965명의 취학자에서 1930년에는 1,639개교, 46만 6,063명의 취학자로 각각 학교수 2.4배, 취학자수 3.1배로 증가했다. 고등보통학교는 공·사립을 합쳐 7개교(1,065명)에서 16개교(4,554명)로 증가했다. 하지만 총인구 48만 8,000여 명에 불과한 일본인을 위한 공립중학교가 1930년의 11개교(5,686명), 공립고등여학교가 24개교(7,724명)이었던 것과 비교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011)朝鮮總督府 學務局 編,≪朝鮮諸學校一覽≫(1937년도). 이 외에 한국인 생도를 주로 한 실업학교,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학을 원칙으로 한 관립전문학교와 한국인 경영의 사립전문학교, 특히 경성제국대학이 창립되었다. 거기에서는 틀림없이 ‘보급개선’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보통학교의 취학률은 1930년에 있어서도 18.5%에 불과했다. 이것은 식민지 통치하에서 한국인이 매우 빈궁하여 교육기회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면과 동시에 일제 공교육에 의한 식민지적 동화교육을 거부하고 민족교육을 지키려는 저항이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재래의 서당에서 한문학습을 통해서 은밀히 민족적 교육을 실시한 것이라든지 또는 야학교 등의 형태에서 보여진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문화정치는 무단정치의 본질적 개선 혹은 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단정치의 서툴고 노골적인 통치방식을 세련되고 보다 교묘하게 바뀌었던 것에 불과했고 식민지 통치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종래와 거의 다른 점이 없었다. 오히려 종래 이상으로 철저하고 체계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보다 교묘하게 행하기 위해 민족운동의 분열을 위한 각양각색의 수단·술책이 취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일면에서는 성공하여 지주계급·예속부르주아지 등 일부의 소위 ‘친일분자’를 식민지 통치에 협력시켰지만, 진정한 민족주의자·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저지할 수는 결코 없었다. 이리하여 독립운동과 식민지 통치자의 탄압은 서로가 치열하게 대립하여 갔다.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그 국내적·국제적 모순에 봉착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전반적으로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대륙침략 기지로서 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일이었고 특히 한국에 대한 경제 수탈은 이 시기에 한층 강화되어 한국인의 몰락은 더욱 촉진되었다.012)渡部學, 앞의 책,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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