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2. 민족교육의 정비
  • 2) 민족운동의 전환과 실력양성론

2) 민족운동의 전환과 실력양성론

 3·1운동 후 국내에서의 직접 항일투쟁이 거의 불가능해진 1920년부터 내외의 민족주의자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점진주의’와 ‘급진주의’의 분화가 그것이다. 민족주의 우파를 대표하는 점진주의자는 일본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문화정치를 내건 일본의 새로운 정책에 일단 영합해서 반일운동을 교육진흥·국산품애용 등의 타협적 운동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이에 민족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급진주의자는 비타협적인 철저한 투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자의 동요와 분화현상은 완전한 식민통치체제 아래서는 독립운동이 몹시 어려운 점, 그리고 3·1운동의 실패와 베르사유 강화회의·워싱턴군축회의 때의 독립청원운동의 실패에서 온 좌절감, 또는 반일 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에워싼 의견대립 때문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조선의 민족자본이 지니는 정치적 취약성을 반영하는 민족주의자의 동요와 그것을 이용한 일본의 파괴공작·민족분열정책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민족주의자에 대한 일본의 파괴·분열공작은 격화되어 식민지체제라는 국내 여건과 중국의 반식민지화, 일본군의 시베리아 점령이라는 국외 여건 아래 강행되었던 것이다.013)강동진,≪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0), 379쪽.

 사실 3·1운동 직후의 단계에서 친일파·예속자본을 빼놓고 민족주의자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비타협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는 점진주의라는 이름 아래 일본 통치자와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개량주의노선을 택해 교육·산업·문화의 향상을 수단으로 삼는 이른바 실력양성론으로 기울었다.

 이 합법적 조직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적 운동은 그 목적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애국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지만 해방과 독립을 싸워 차지한다는 것을 깃발로 내걸었던 민족주의 본래의 처지로 말하면 일보 후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국이 정치단체를 빼놓고 각종의 이른바 ‘문화단체’를 허용한 것은 반일운동의 진정화를 노린 일종의 ‘안전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는 이 안전판에만 달라붙어 독립 달성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수단으로 교육·문화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와 같은 개량주의적 경향은 이미 한말에도 있었다. 특히 의병투쟁에 반대한 애국계몽운동계열에서는 교육·문화적 운동에 역점을 둔 비투쟁적 운동방식으로 개량주의에 빠지기 쉬운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화운동이란 민족해방운동의 하나로서 민족주의자가 외친 것이 아니라, 총독부 권력이 점진적·타협적 요소를 이용하여 민족주의 우파를 지배체제 쪽으로 끌어들여 그들로 하여금 민중의 치열한 반일·독립의 의사를 대일 타협의 방향으로 유도해서 민족독립운동을 거세시키려고 꾀한 민족분열정책의 하나였다.014)강동진, 위의 책, 386쪽.

 문화정치에서 추진한 문화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먼 장래에 기하기 위해 문화적 생활을 증진시킨다는 것으로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즉 식민지 지배체제를 부인하지 않고 식민지배에 대한 정면도전을 회피하면서 문화운동에 치중하도록 하는 것으로 문화통치는 기만적이며 무단통치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문화통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개량주의로 운동노선을 변경(변절)하여 일제를 적대시하는 직접 투쟁을 포기하고 먼 장래의 독립을 위해 문화운동에 치중하는 운동과 일치성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제가 문화통치를 추진하기 위해 주장한 참정권 획득 청원과 실력양성 그리고 민족성 개조 등 세 가지 강령을 개량민족주의자들이 수용하는 형태가 되었다. 따라서 자치론자인 李光洙의 민족개조론·선실력양성론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실력양성운동에서도 민중계몽교육 등 교육진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