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2. 민족교육의 정비
  • 3) 제2차<조선교육령>과 민족교육

3) 제2차<조선교육령>과 민족교육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이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식민지 교육정책도 수정되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정치가 기만적이고 교활한 정책이었던 것처럼 이 시기의 교육정책도 식민지 교육정책을 보다 더 심화시킨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문화정치는 문화주의라는 외형의 틀속에서 민족말살과 동화주의 정책을 본격화하는 것으로 이 시기의 교육정책은 이러한 식민지 정책의 틀을 구현하기 위한 융화정책을 반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변경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교육정책도 표면상으로는 변경되었으나 근저에 깔려 있는 동화주의와 황민화정책은 결코 수정되거나 포기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교육에도 융화정책을 반영시켜 교육제도에 수정을 가하였다. 종래에 저급하게 짜여졌던 학교체계를 고쳐, 일본의 학제와 비슷한 제도로 개편했으며,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도 표면상 완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즉 이것은 한국 국민의 반일감정을 무마하려는 유화책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시동인·내선일체·내지연장주의 등의 정책 술로건을 내세우면서 한국 국민에 대한 동화주의 교육을 더욱 본격화해 갔다. 이에 따라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이 되지 않으면 공교육체계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3·1운동 후 일제의 교육정책은 표면상 한국인의 교육을 일본의 교육과 동일한 수준으로 높여 놓은 듯이 보이게 했으나, 학교교육의 실제에 있어서는 교묘하게 차별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 설립의 사립학교 성장을 억제하고, 오히려 동화주의 교육을 더욱 본격화하였던 것이다.

 제2차<조선교육령>으로 새로 개정된 교육제도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015)손인수,≪한국근대교육사≫(연세대 출판부, 1971), 169쪽.

①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또는 5년)으로 연장하였다. ② 종래 각급 학교에서 폐지되었던 한국어가 필수과목으로 부활하였다. ③ 한국인과 일본인과의 공학을 원칙으로 했다. ④ 새로 사범학교와 대학 설치의 길을 마련하였다. ⑤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의 제도에 따랐다.

 또한 제2차<조선교육령>에 의한 학교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인이 취학하는 학교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를 별도로 두어 전자를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라 하고, 후자를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라 칭하게 하였다. ② 각급 학교의 수업연한을 연장하여 보통학교는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으로, 실업학교는 2∼3년에서 3∼5년으로 하였다. ③ 그리하여 종전에 초등학교에서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11∼12년이었던 전체 교육연한이 11∼16(17)년으로 연장되었다. ④ 실업학교는 보통학교에서 접속하는 3∼5년 과정의 중등학교로 하고, 실업보습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 수료자를 수용하는 2년제 직업교육기관으로 삼았다. ⑤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의 학제에 준하였다. ⑥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사범학교(특과사범학교, 관립사범학교), 고등교육기관으로 대학을 신설토록 하였다. ⑦ 보통학교(6년)에 2년제의 고등과를 둘 수 있도록 하였다. ⑧ 이밖에 공립보통학교에 부설학교와 간이학교를 부설할 수 있도록 하고,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 보습과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동아일보≫는 일제가 새로 개악한<조선교육령>을 공포하자 그것을 폭로·규탄하고 논설에서 “생각하건대 조선사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까닭이 아니라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을 융합하여 일층 적절히 말하자면 동화하여 혼연한 그 민족을 성하게 하여 일본제국의 영원한 기초를 정하자 함이니… 본 교육령의 입법자가 또한 여차한 심사로써 이 법을 정한 것이 분명하니 이는 순연한 교육 그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목적을 포함하였으며 정치적 목적을 포함하되 자유정치의 이상을 포함한 것이 아니라 특히 제국주의적 이상을 간직한 것이다”016)≪동아일보≫, 1922년 2월 10일.라고 본질을 비판하였다.

 일제가 개정한<조선교육령>의 내용을 요약하면 교육체계는 일반교육체계와 값싼 노동력양성을 위한 특수한 식민지 노예교육체계로 되었다.

 일반교육체계는 6년제 보통학교, 5년제 고등보통학교, 3∼5년제 여자고등보통학교, 5년제 전문학교, 2년제 대학 예과, 4년제 대학으로 구성되었다. 일제가 일부 학제·학년을 늘이면서 일반교육체계를 새로 확대 개편한 것은 식민지정책에 필요한 심부름꾼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것이 더욱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요구로부터 일제는 조선사람들의 향학열에 편승하여 ‘선정’이나 베푸는 듯이 가장하면서 식민지인 양성을 위한 새로운 일반교육체계로 개편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일반교육체계는 계급적 차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사람본위’의 교육을 실시한다고 하였지만 절대다수의 민중의 자녀들은 학교교육을 자유롭게 받을 수 없었다. 오직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요구에 순종하는 지주 등 부유층의 자녀들만이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계급적 차별에 따라 우선 일반교육체계의 기층단위인 6년제 보통학교마저 그 설립의 지역적 범위를 극히 제한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교육받을 앞길을 열어준다고 선전하면서도 6년제 보통학교는 큰 도시에 집중시키고 군에 1∼2개밖에 설립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4년제 보통학교는 대부분 농촌지역에 두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있던 농민의 자녀들은 저급한 노동력을 양성하는 교육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제는 또한 학교 입학조건과 진학제도를 새로 규정하였다. 당시 6년제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전문학교·대학교의 입학자격을 얻자면 예외없이 재산증명서와 가정의 정치적 동향에 대한 교장 및 경찰서의 ‘평정’이 있어야 하였다.≪동아일보≫편집자들은 당시 서울시내 보통학교의 입학실태를 보도하면서 “비록 입학자격을 구비한 자라도 재산의 유무를 가려 학비가 충분치 못 한자는 전부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017)≪동아일보≫, 1921년 3월 27일.라고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이와 같이 빈곤한 가정의 자녀들은 보통학교에도 가기 힘들었다. 1921년에 4년제 보통학교의 월사금은 40전이고 입학비용은 4원30전이었다. 학교경비에 보탤 ‘부과금’·‘후원비’ 등을 제외하고도 학생 1명당 1년간의 학비는 모두 20원 이상이었다. 당시 농민의 1년 평균 수입이 30원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농민들이 자기 자녀들을 보통학교에 보내기가 곤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일반교육체계의 보통학교인 6년제 보통학교의 학비를 4년제 보통학교의 학비보다 거의 2배나 높게 함으로써 한국인의 자녀들이 6년제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없게 의도적으로 제한해 놓았다.

 새로 개악한 일반교육체계에서는 전문학교나 대학 예과·본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에 있어서 일제의 민족적 및 계급적 차별정책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018)박득준,≪조선근대교육사≫(한마당, 1989), 244쪽. 일제는<조선교육령>에서 한국인들에게도 대학교육의 길을 열어놓았으나 실제는 친일분자나 대지주의 자제 외에는 대학입학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또한 한국인에 의한 대학설립은 절대 불허하였다.

<盧榮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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