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3. 민족교육운동의 전개
  • 2) 민립대학설립운동

2) 민립대학설립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물론 실패된 운동이었으나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3·1운동 이전의 제1차<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에서 대학을 설립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학설립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1922년 2월 6일 개정·공포된<조선교육령>에 의해서였다.

 소위 제2차<조선교육령>이라고 칭하는 이<조선교육령>의 개정된 내용중 핵심적인 것은 한국에서 대학교육과 사범교육의 실시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개정된 ‘<조선교육령>에 관한 유고’022)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施政年報≫(1921년), 7쪽.에서 교육의 쇄신을 위해 교육제도를 개정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 새로이 사범교육과 대학교육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內鮮 공통의 정신에 의해 일본 내지와 동일한 제도하에서 교육시설의 확충과 완비에 힘쓸 것이라고 하였다.

 ≪동아일보≫1922년 1월 27일자에 의하면 총독부 학무국장은 교육령 개정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종래의<교육령>은 그 취지가 한국인을 본위로 한 것이었으나 신교육령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인·한국인 모두 일본 본토의<실업교육령>·<전문학교령>·<대학령>에 의한다고 하였다.

 민립대학설립에 대한 주장이 하나의 실천적 운동으로서 전국적 규모로 전개된 것은 1923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사립대학설립에 대한 주장이나 관립대학설립에 대한 주장은 있어 왔다. 한말의 애국지사 安重根은 프랑스인 천주교 성직자에게 대학설립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다. 개신교에서는 일찍부터 선교계의 대학설립을 꾸준히 추진하였으나 자금문제와 교육개정 이전의 교육령에 대학에 대한 규정이 없어 좌절되었다. 한편 민족주의운동 지도자들은 한말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기금으로 민립대학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법규미비와 총독부의 회피로 실패하였다.

 한국에서 대학설립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추진이 본격화되기는 3·1운동 이후의 일이었다.

 1921년 5월 교육법 개정을 위하여 구성된 임시교육조사위원회에서 대학설치를 결정하였다. 그 때 한국인측에서도 전국각지의 유지의 이름으로 관립대학설립을 총독부에 건의하였다. 총독부는 1922년 초부터 대학교육 실시를 구체적으로 추진하면서 1922년 4월 개정된<교육령>을 공포함으로써 대학설립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추진된 과정을 보면 1922년 2월≪동아일보≫가 민립대학설립을 주창하고 1922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총회에서 민립대학설립을 주장하여 이것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조선교육회를 모체로 하여 추진되었다. 조선교육회는 1920년 6월에 韓圭卨·李商在·兪鎭泰 등 애국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조선교육회는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苦學生學校를 운영하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애국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조선교육회 회원들에 의하여 민립대학 창설이 발기되고 1922년 11월에 이상재를 대표로 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되게 되었다. 그리고 1923년 3월 29일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그해 4월 2일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위원장에 이상재, 상무위원에 兪星濬·李昇薰·韓龍雲 등이 선출되었다.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자≪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그 발기의 목적과 의의를 강조하면서 적극 지지하였다.

우리의 체면, 조선인의 생명보존이 이 대학기성과 관계가 있다고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보라, 이 민립대학은 첫째 민중의 힘으로써 하는 최고학부이며, 둘째 민족의 이상으로써 하는 최고 결정이라. 이 민중에 기본한 최고학부의 발달로 인하여 조선인민의 과학이 발달할지며 다만 발달할 뿐 아니라 조선민족을 위한 발달이 될지며 실로 조선인 소유의 문화가 될지며 이 민중적 이상의 최고 결정이 그 가치를 발휘함으로 하여 조선사람의 전도방향은 비로소 과학에 기본한 확실성을 갖게 될지니 이렇게 생각하고 또 이를 생각하면 민립대학의 기성은 다만 우리들에게 지식을 줄 뿐 아니라 과학에 기본하여 발달할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되는 도다. … 조선민족이 빈하고 약하나 실로 마음과 힘을 합치면 어찌 이 사업을 기성치 못하리오(≪동아일보≫, 1922년 12월 16일).

 발기총회에서 가결된 민립대학창설의 총체적 계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반영되었다.

 민립대학창설의 제1기 사업은 기본금 400만 원으로 부지 5만 평을 사서 교사 10동과 강당 1동을 짓고 교원을 양성하는 한편 법과·문과·경제과·이과의 4개학과를 설치하며, 제2기 사업은 300만 원으로 공과를 신설하고 이과와 다른 과를 확장하며, 제3기 사업은 300만 원으로 의과와 농과를 설치하고 운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기성회발기총회가 있은 후 전국 백여 곳의 부·군에 지방부가 설치되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년도 채 안되어서 그 열기가 식어지고 용두사미처럼 되어 실패로 끝나버렸다.

 이 운동의 실패원인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탄압과 1923년의 대홍수와 같은 재해의 탓도 있지만 다른 요인들도 작용하였던 것이다.

 곧 가장 큰 실패원인은 이 운동의 지도자와 간부들의 희생적인 활동 부족과 열성 부족이었다. 당시로서는 막대한 거금을 모금하고 민중의 자발적이며 희생적인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도자와 간부들의 절대적인 희생적 활동이 요구되었으나 그들의 실제 활동은 지극히 부진하였다.

 또한 이 운동의 추진세력과 운영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신이 그 실패원인이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민족운동 즉 노동공제회 등 기타 단체의 모금된 기금이 행방도 모르게 된 불미스러운 일들이 민중의 불신을 사게 되어 헌금을 기피하게 되고 따라서 지방부는 중앙으로의 송금을 기피하였다.

 또한 당시 한국인의 극심한 경제적 빈곤이 실패원인이 되었다.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으로 민중은 극도로 빈곤하였고, 친일적 지주들이나 부호들은 일제의 눈치를 보면서 헌금을 기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중산층 주도의 민족운동의 지지기반이 미약하였거나 상실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3·1운동 후 1920년대는 자각된 민중들이 계층별 사회운동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농민운동·노동운동·청년운동·여성운동·형평운동 등 사회운동이 보다 조직적으로 적극화되면서 민중들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경제자립운동과 무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민중계몽교육에 능동적으로 열중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생존권 확보와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문제에 관심이 더 컸던 것이니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대해서는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23년부터는 사회주의운동이 보다 조직적이고 본격화되어 우파민족주의자들의 입지가 더욱 위축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3·1운동 당시 선도적이었던 천도교와 기독교는 민립대학운동에 비협조 내지는 소극적이었다. 3·1운동 후 천도교는 독자적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기독교는 자체의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대학승격 문제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운동에 호응하기가 어려웠다.

 이처럼 중산층 주도의 민족운동의 지지기반이 미약한 가운데 이들 중산층들은 1923년에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힘의 분산과 지지기반의 분산을 스스로 자초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산층 주도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은 그 중심적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모금은 거의 힘든 일이었다. 이 운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은 헌금의 모금이었는데 모금이 잘 안되는 상태에서 외형적 조직이나 선전에만 치중된 결과가 되어버렸고 이 운동은 실패하였다.023)노영택,<민립대학설립운동연구>(≪국사관논총≫11, 국사편찬위원회, 1990).

 이처럼 이 운동이 실패하는 동안 총독부는 1921년부터 추진하여 오던 관립대학을 경성제국대학이란 명칭으로 1924년 개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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