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3. 민족교육운동의 전개
  • 3) 민중계몽 교육운동
  • (2) 민중교육기관의 성격

(2) 민중교육기관의 성격

 일제하 서당은 본래 서당의 전통적 기능인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계승·발전시켰다. 특히 개량서당은 교과내용이나 교사의 질에 있어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한편 야학에서는 근대교육을 받은 청년지식인들이 근대적 교과로 학생들을 교육했다. 교과내용에서 보아도 근대학교와 같은 교과를 설정하여 시대에 맞는 초등교육의 기능을 유지했다.

 이들 서당과 야학에서는 당시의 사립학교와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먼저 조선역사·조선지리·조선어 교수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일제는 한국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영원히 말살하기 위하여 각급 학교에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따라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식민지악법에 저촉되어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 수업은 일제의 눈을 피해가면서 비밀리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북도 경성의 사립 온천학교에서는 비밀리에 우리의 역사와 지리를 교육하였는데, 1916년의 함경북도 경무부 비밀자료에는 이에 대하여 “지금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가르치고 있는 ‘조국생각가’와 安重根을 찬양한 몇 수의 불온 창가 및 불온 사상을 담고있는≪조선사≫·≪대조선사≫등의 교재들과 불온하기 때문에 발행이 금지된≪초등본국역사≫·≪초등본국지리≫등을 발견하였고 학생잡기장에 ‘조선어를 읽으라’고 표제한 불온 문서를 필기한 것을 발견하였다”037)姜德相,≪現代史資料≫25(みすず書房, 1966), 15쪽.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의 교육을 통한 반일애국교육은 사립학교에서는 물론 서당들에서도 일반적으로 적용된 방법의 하나였다.

 당시 전라남도 경무부장의 자료보고를 통해서도 서당에서의 교육내용을 엿볼 수 있다. 즉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면의 한 서당교사가≪봉성진 및 문선언즉기≫라는 책을 교재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면서, 이 책에서는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한 싸움에서 목숨을 바친 崔益鉉 등 애국적 유생들의 민족적 절개를 따를 것을 호소한 내용들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조선 침략원흉들이 우리 민족 앞에 저지른 만행을 신랄히 폭로한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었다고 하였다.038)姜德相, 위의 책, 18쪽.

 한편 사립학교·서당·야학 등 초등교육기관에서는 한글을 교수하기 위한 조선어교육도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이미 일제강점 전에 출판된≪유년필독≫·≪초등국어어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국어책들을 가지고 교육하였다. 그리고 사립중등학교에서는 周時經이 쓴≪말의 소리≫·≪국어문법≫등에 대한 교수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에 의한 민족어 탄압책동이 노골화되었던 조건에서도 순수한 민족어를 지켜나가는 데서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었다.039)박득준, 앞의 책, 227쪽.

 또한 이 시기 반일민족교육에서 보편적으로 실시된 방법의 하나가 애국적인 창가보급이었다. 애국적 지식인들은 국가의 성쇠는 국민정신에 달려있고 국민정신을 함양시키는 데는 가곡이 제일이라고 여겨 학생들에게 애국창가를 비밀리에 보급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애국적 지식인들은 당시 일제 강점자들이 각급 학교들에서 창가수업을 ‘천황주의’를 설교하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삼고있던 조건을 역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적 창가를 보급하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애국창가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비밀리에 애국창가집을 편찬하는 데 적극 힘썼다. 그리하여 개성의 한영서원을 비롯하여 여러 학교들에서 창가집이 비밀리에 출판되어 학생들 속에 널리 이용·보급되었다.040)姜德相,≪現代史資料≫15(みすず書房, 1966), 10∼17쪽.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하에서도 사립학교와 서당 그리고 야학에서 여러 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반일애국교육을 교육함으로써 학생들과 민중들에게 반일정신과 애국심을 키워줄 수 있었다.

 그리고 민중교육기관이 민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조건은 서당이나 야학 교사들의 의식과 그들의 언동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기 때문이다.

 ≪동아일보≫1936년 2월 1일자를 보면, 입학문제 좌담회 석상에서 김태영이 언급하기를 당국이 서당의 경영자 또는 교원이 부적하다는 이유로 서당을 많이 폐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당의 경영자와 교사들의 민족의식이 서당교육에 반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에 본부를 둔 신흥종교단체인 만인교 교주 정창선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개량서당을 개설하여 민족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041)慶尙北道警察部, 앞의 책, 76쪽.

 3·1운동에 참가한 서당교사와 학생들의 사례도 많았는데 황해도의 경우 신천군 용천에 있는 기독교회 부속의 서당학생들이 만세시위를 기도하다 체포되었고 재령군 청석두의 기독교도와 서당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렸다.042)姜德相, 앞의 책(1966b), 337쪽.

 또한 평안북도 용강군 해운면에 거주하는 서당교사 김정식도 태극기를 만들어 사당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043)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獨立運動史 資料集≫5(1966), 8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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