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Ⅰ. 교육
  • 4. 민족교육의 수난
  • 2) 황민화교육과 민족교육의 수난

2) 황민화교육과 민족교육의 수난

 황민화교육은 한국인을 일본인화하여 침략전쟁의 도구화하려는 목적으로 강행된 것이었다. 민족을 말살하는 것이 황민화정책의 주요과제였기 때문에 황민화교육에서는 민족말살을 위한 온갖 방법이 강구되었다.

 황민화교육의 추진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1938년 3월에 제3차<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각급 학교의 규정을 새로 제정하여 학제를 개편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인 학생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일본역사·수신 등의 교과를 강화하는 반면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약화시킴으로써 황민화교육을 강화하고 동화주의 교육을 그들의 군사목적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추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대에 이르러 황국신민화 교육의 군사체제화가 급속히 추진되었다. 전체주의의 이념과 군국주의 체제하에 총력전시체제화 교육이 강조된 군국일본의 정책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이를 추진키 위해 조선총독부는 1943년에 또 다시<조선교육령>(제4차)을 제정하였던 것이다.049)김영우·피정만,≪최신학국교육사연구≫(교육과학사, 1995), 431쪽.

 황민화교육정책이 강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한 것이 사립학교였다. 왜냐하면 이때의 사립학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교육정책에 맞서 나름대로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제가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사립학교에 대해 가한 탄압책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되었다.

(1) 사립학교의 개폐:조선총독부는 사립학교의 교육목적과 내용을 변경하도록 하고, 민족주의 색채가 농후한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로 개편토록 하였다. 이같은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남궁억이 설립 운영하던 모곡학교를 공립학교로 개편하고, 조선어학회사건(1942)으로 학교장이 검거된 경상북도 김천중학교를 공립으로 개편하였으며, 보성·연희·이화·숙명 등의 사립전문학교가 개편되었다. (2) 한국인 교원의 축출과 일본인의 지도권 장악:조선총독부는 사립학교의 한국인 교장을 축출하고 대신 일본인 교장을 두거나 일본인을 교두로 삼게 하여 이들 일본인이 학교의 실권을 잡고 학교를 그들의 구미에 맞는 방향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교당국은 일본인 시학관을 수시로 사립학교에 파견하여 사립학교의 교육내용과 교육활동을 감독하였다. 이같은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연희전문학교에 일본인 교장을 파견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일본인 교두를 파견하였으며, 오산중학교에도 일본인 교장을 파견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한일인 공학원칙을 명분으로 하여 신설되는 사립학교에는 반드시 일본인 교장을 두도록 하였다. (3) 교명 변경과 사립학교의 설립 불허:조선총독부는 특정 사립학교에 대해 민족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를 붙여 교명을 바꾸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대구의 信明학교는 南山으로 교명을 바꾸고,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가 항도고등여학교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원칙적으로 불허하였다, (4) 재단법인 조직 강요:조선총독부는 모든 사립학교에 대하여 단기간내에 재단법인을 조직할 것을 명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학교는 폐쇄한다고 위협하였다. 이는 사립학교의 충실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션계 사립학교와 민족주의적 사립학교를 통제하려는 데 그 근본 의도가 숨어 있었다. (5) 신사참배 강요:조선총독부는 선교계 학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이에 응하지 아니하는 학교를 강력히 응징하였다.

 이 결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숭실전문학교·숭실중학교·숭의고등여학교·신성학교·보성여학교·계성학교·신명여학교·명신학교·신흥학교 등 장로교 계통의 선교학교들이 폐교되었다.

<盧榮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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