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1. 일제의 언론정책
  • 1) 법적 규제

1) 법적 규제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의 일관된 언론정책은 철저한 강압과 통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역대 총독의 통치방식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탄압·통제의 강경정책과 함께 때로는 홍보·회유의 온건정책을 가미하였다. 이러한 강·온 양면정책은 일본이 한국침략을 시작한 한말부터 써온 수법이었다.

 탄압정책의 첫 단계는 한국인들이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도록 근원적으로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1910년 8월의 한일합방 후 강압적인 무단정치를 실시하면서 총독부는 한국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기존의 신문을 모두 없애버리고 서울에서 발간되는 한국어 신문은 총독부의 기관지≪매일신보≫하나만 남겨두었다. 반면에 신문을 발행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한국인과는 다른 차별적인 법령을 적용하여 일인들은 서울과 각 지방 도청소재지에서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1920년에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한다는 명분으로 제한된 숫자의 신문 발행을 허용하였다. 이로써≪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1924년부터는≪시대일보≫·≪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의 3개 민간지가 허용되었으나, 신문에 대한 지면통제와 검열, 언론인에 대한 사법처분 등 다양하게 언론탄압을 가하였다. 특히 1930년대에는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강화되면서 언론통제는 더욱 엄격하고 조직적인 양상을 띠었다. ‘국책적 차원’에서 정보를 관리하고 신문의 기사와 편집 내용까지 간섭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같은 탄압은 1940년 8월에≪조선일보≫와≪동아일보≫의 발행을 금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총독부가 이와 같은 강압적 탄압과 병행하여 실시한 홍보·회유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자체 언론기관으로서 기관지를 창설하여 침략정책을 홍보하고, 反日여론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총독부의 기관지≪매일신보≫와 일어판≪경성일보≫, 영어판≪The Seoul Press≫를 동원하여 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특히 문화정치를 표방했던 1920년대 이후에는 선전과 홍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단정치기에는 강압적인 명령으로 시행하던 식민지 통치방식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계몽적인 행정홍보와 함께 총독부의 치적을 선전하였다. 선전영화를 제작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상영하고 포스터와 기관신문을 활용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때의 선전과 홍보정책을 일컬어 흔히 총독부의 ‘광고정치’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다.050)≪동아일보≫, 1921년 6월 20일,<廣告는 商戰의 砲彈, 국가의 정치도 광고에 달려, 최근에 생긴 놀랄만한 사실>. 1925년 2월 25일자≪조선일보≫의 사설은 “누구나 조선총독부 정치를 비난할 때에 ‘광고정치’라 한다”고 말하면서 총독부가 정치적인 실적을 지나치게 선전 홍보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051)≪조선일보≫, 1925년 2월 25일, 사설<朝鮮經濟政策의 變遷, 廣告政治는 變解原理의 反證>.

 둘째로는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유도하기 위한 홍보전략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출판물을 발행하고, 외국인 기자를 친선초대하여 선전에 동원하였다. 총독부의 영어 기관지≪The Seoul Press≫가 그 같은 역할을 맡은 선전매체였다.≪The Seoul Press≫는 통감부가 발행하기 시작했던 1907년부터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홍보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1908년 6월≪대한매일신보≫사장 영국인 베델(裴說, E. T. Bethell)에 대한 제2차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5월 23일에는 영문과 일어로 된 팜플렛<한국의 선동 신문>(Incendiary Journalism in Korea, 같은 내용의 일어판은<韓國に於ける排日新聞紙>)을 발행하여≪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및 영문판 신문을 비난한 것을 비롯해서, 베델의 재판이 끝난 뒤에는 3일간에 걸친 공판내용을 전문 수록한 책자≪한국에서의 외국어 신문-베델에 대한 재판≫(Foreign Journalism in Korea, Proceedings Against Mr. E. T. Bethell)을 발행한 일도 있었다.052)정진석,≪대한매일신보와 배설≫(나남, 1987), 263∼268쪽.
―――,<The Seoul Press와 일본의 對韓 침략 홍보>(≪신문과 방송≫, 1986년 4월호), 74∼87쪽.
신민회 사건으로 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량으로 투옥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인 1912년에는 일어판≪朝鮮陰謀事件≫과 영어판≪The Conspiracy in Chosen≫이라는 제목으로 검사의 기소장, 피고들에 대한 신문 내용, 판결문 등을 수록한 책자를 발행했고, 3·1운동 때에도 이를 비난하는 팜플렛<조선의 ‘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Agitation)을 발행하였다.

 셋째 비판적인 언론인 또는 언론기관을 매수하고 신문을 회유하는 방책이었다. 이는 총독부가 집계한 일제하의 언론탄압 자료에서 나타나는<간담>과 같은 항목이 회유와 협박의 구체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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