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2. 무단통치기의 언론
  • 1) 총독부 기관지 독점기

1) 총독부 기관지 독점기

 합방 후 한말에 발행되던 대표적 신문≪뎨국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와 같은 민족 언론은 완전히 압살당하고 한국인들은 표현 기관을 갖지 못하였다. 일제는 합방과 함께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없애고 ‘대한’, 또는 ‘황성’·‘제국’ 등 한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단어는 일체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신문의 題號도 수난을 겪었다.≪大韓新聞≫은≪漢陽新聞≫으로,≪皇城新聞≫은≪漢城新聞≫으로,≪大韓民報≫는≪民報≫로 각각 바뀌었다.≪대한매일신보≫는≪매일신보≫가 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 신문들도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외에는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국어로 발행되는 일간지는 총독부 기관지≪매일신보≫(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 발행)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는 민간지가 발간되지 못했던 1910∼1919년 사이의 10년을 ‘無新聞期’(‘지하 신문기’와 ‘반민족신문기’)로 규정하거나,055)林根洙,<韓國 커뮤니케이션史 硏究의 方法에 관한 一考察>(≪新聞硏究≫, 1975년 봄호), 116∼146쪽. ‘암흑기’로도 부른다.056)李鍾洙,<조선신문사>(≪東光≫, 1931년 12월호), 73쪽.
霞 汀,<朝鮮新聞發達史>(≪新東亞≫, 1934년 10월호), 56쪽.
車相瓚,<朝鮮新聞發達史>(≪開闢≫, 1935년 3월호).
崔 埈,≪韓國新聞史≫(일조각, 1965), 186쪽.
위의 논문이 모두 1910∼1920년 사이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1940년 8월부터 1945년 8월 사이에는 두 번째로 민간지가 발행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역시 ‘무신문기’에 해당한다고 규정짓는다. 이 시기에도≪매일신보≫는 발행되었지만 이는 총독부의 기관지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신문이 없는 ‘무신문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민족지가 발간될 수 없었던 시기에 나왔던≪매일신보≫역시 ‘신문’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일제 통치기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史料的인 가치는 오히려 그만큼 더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반민족적인 신문이기는 하지만 민족지가 발간될 수 없었던 시기에는≪매일신보≫가 중요한 사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10∼1920년과 1940∼1945년 사이를 ‘무신문기’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총독부는 무단정치 기간에는 한국어신문≪매일신보≫, 일어신문≪경성일보≫, 영어신문≪더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와 같은 기관지 독무대가 되도록 하였으며, 민간지의 발행을 허용한 후에도 이들 기관지에는 여러 가지 특혜를 주면서 보호·육성했다. 세 기관지의 창간과정은 모두가 별개의 신문으로 출발하여, 합방 후에는 통합되었다가 다시 분리되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매일신보≫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裴說)이 창간한≪大韓每日申報≫를 매수하여 제호를 바꾼 것이다.≪대한매일신보≫는 梁起鐸·朴殷植·申采浩 등 민족진영 인사들이 참여하여 한말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었다. 일제의 탄압과 싸우던 베델은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Alfred W. Marnham, 萬咸)으로 바꾸어≪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다가 1909년 5월 1일에 사망하였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자 만함은 이 신문을 통감부에 700파운드를 받고 매도하였다. 만함이 평가했던≪대한매일≫의 매도 금액은 500파운드였는데 통감부는 만함이 평가한 액수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매수하였던 것이다. 만함은 이 금액에 만족했고, 통감부도 그 동안 골칫거리였던 이 신문에 관련된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다.057)정진석,≪대한매일신보와 배설≫(나남, 1987), 458∼363쪽.
런던에 있는 영국 공공기록보관소(Public Record Office) 소장문서, FO 262/1065, Bonar가 MacDonald에게, 21 May 1910, No. 34:FO 371/877, Bonar가 Gray에게, 21 May, No. 30, pp. 205∼212.

 일본이 이 신문을 매수한 것은 한일합방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인 5월 21일이었다. 통감부는 이 신문을 매수한 사실을 비밀에 부친 채 발행인을 李章薰으로 잠시 변경해 두었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즉시 친일적인 신문으로 논조를 바꾸었다. 합방 이튿날인 1910년 8월 30일부터≪대한매일신보≫의 ‘대한’ 두 자를 떼고≪每日申報≫로 제호를 바꾸어 본격적인 친일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령은≪대한매일신보≫를 그대로 이어받아 국한문판은 제 1642호, 한글판은 제 939호부터 출발했다.≪매일신보≫는 합방 후에 발행한 첫 호에<同化의 主義>라는 논설을 싣고 합방으로 일본과 한국이 공동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京城日報≫는 1906년 9월 1일에 통감부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유력한 신문을 발행하여, 對韓보호정치의 정신을 내외에 선양하고, 日鮮融和의 大義를 唱導”한다는 명목으로 창간하였다. 이토는 주한 일본공사관의 비밀 기관지였던≪漢城新報≫와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의≪大東新報≫를 매수하여 새 신문을 창간하면서≪경성일보≫라 이름지었다.058)藤村生,<京城日報社 由來記, 歷代社長の能不能と其退社理由>(≪朝鮮及滿洲≫, 1924년 9월호), 39∼48쪽.

 영문 일간지≪더 서울 프레스≫는 원래 영국인 하지(Alfred Weekley Hodge)가 1905년 6월 3일에 창간하였는데 1906년 12월경 통감부가 매수하여 기관지로 만든 신문이었다. 이토는 이 신문을 베델의≪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와 선교사 헐버트(Hulbert)의≪코리아 리뷰≫(≪Korea Review≫)에 대항하려는 목적에서 발행하였는데 합방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외국인들에게 홍보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