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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무단통치기의 언론
  • 2) 도쿠토미의≪국민신문≫과≪매일신보≫

2) 도쿠토미의≪국민신문≫과≪매일신보≫

 ≪매일신보≫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두 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한국어신문이었다. 그러나≪매일신보≫는 독립된 신문사가 아니라, 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인≪경성일보≫에 통합되어≪경성일보≫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의 지시·감독을 받으면서 발행되었다.

 ≪경성일보≫와≪매일신보≫를 통합한 새≪경성일보≫의 최고 책임자로는 일본 貴族院의원이면서≪國民新聞≫의 사장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가 취임하였다. 도쿠토미는 25살 때인 1887년 2월에 民友社를 창설하여 월간지≪國民之友≫를 발행하기 시작한 이래≪국민신문≫(1890. 2),≪家庭雜誌≫(1892. 9),≪더 파 이스트≫(The Far East, 1896. 2)를 연달아 창간하였다. 도쿠토미는 정치인이면서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역사학자였던 거물로 서울에 상주할 형편이 아니었으므로≪경성일보≫의 감독이라는 지위에서 요시노 타자에몽(吉野太左衛門)을≪경성일보≫사장에 임명하였다.059)藤村生, 위의 글, 39∼48쪽.
≪京城新報≫, 1910년 10월 6일,<京城日報の披露>.
요시노는 도쿠토미가 경영하는≪국민신문≫에서 부편집장 겸 정치부장, 理事 등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로써≪경성일보≫―≪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이면서 도쿠토미의 감독하에 위탁경영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매일신보≫의 판권에 기재된 형식상 편집인과 발행인은 한국인이었다. 합방 직전 통감부가≪대한매일신보≫를 매수했을 때에 발행인으로 내세웠던 이장훈은 합방 후에도 잠시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남았다가 2개월 후인 10월 22일에 물러나고 이때부터는 발행 겸 편집인 卞 一, 인쇄인은 李蒼으로 바뀌었다. 변일은≪대한매일신보≫때부터 이 신문에 근무했던 사람이다.≪매일신보≫의 발행인과 편집인은 경영이나 편집에 실질적인 권한은 없고 ‘편집장’ 정도의 제작실무를 맡은 사람에 불과했다.

 ≪매일신보≫는 1912년 3월 1일부터는 한글판 신문을 폐지하는 대신 사회면인 제3면을 한글전용으로 제작했다. 한글판≪매일신보≫는 1907년 5원 23일에 창간되어 국한문판과 함께 합방 후까지 발간되었으나 5년만에 국한문판에 통합된 것이다.≪매일신보≫는 한글판을 ‘폐간’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확장’이며 ‘合刊’이라고 주장하는<社告>를 게재하였다. 한글판을 없애면서 우리 나라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한글 5호 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한글 5호 활자의 글자체는 閔友植의 부인이 쓴 한글 궁체로서 자모는 동경에 있는 민우사의 협조를 얻어 만든 것이다.060)≪매일신보≫, 1938년 5월 1일, 좌담회 참조. 민우사도 도쿠토미가 경영하는 출판 잡지사였다.061)和田守·有山輝雄,<民友社·國民新聞社の成立展開>(≪德富蘇峰 民友社關係 資料集≫ 民友社 思想文學叢書 제1권, 일본:三一書房, 1986), 428∼429쪽. 민우사는 1898년부터 인쇄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에≪매일신보≫의 한글활자 개량작업을 맡았던 것이다.

 1913년 11월 11일 경성일보사는 자본금 7만 원의 합자회사로 조직을 바꾸었다.062)≪朝鮮總督府官報≫, 1913년 11월 11일.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매일신보≫는 합자회사≪경성일보≫가 발행하는 자매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합방 후≪매일신보≫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담당한 편집장이었던 변일은 1915년 1월에 물러나고,063)≪매일신보≫, 1915년 1월 17일,<退社之辭>. 1월 30일부터는 鮮于日이 발행 겸 편집인이 되었다. 선우일도 판권에 발행 겸 편집인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사내의 지위는 일인 편집국장 아래에 있는 편집장이었다. 1915년의≪매일신보≫편집진은 편집장 선우일, 硬派主任 趙重桓, 軟派主任 李相協이었다.064)≪新聞總覽≫(일본 전보통신사, 1915년판), 673쪽.

 1918년 6월에 감독 도쿠토미가≪경성일보≫에서 손을 떼자≪매일신보≫와 일본≪국민신문≫과의 관계도 종지부를 찍었다. 같은 해 9월 18일부터는≪매일신보≫는 편집과장 이상협이 발행 겸 편집인이 되었다. 그 직후인 이해 11월 4일부터는 월요일 휴간제를 없애고 연중 무휴간제로 발행되었다. 1년 뒤인 1919년 8월 이상협이≪동아일보≫창립에 참여하기 위해≪매일신보≫를 떠나자 方台榮이 발행 겸 편집인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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