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3. 문화정치기의 언론
  • 3) 3대 민간신문의 창간
  • (2)≪동아일보≫

(2)≪동아일보≫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발행 겸 편집인 李相協, 인쇄인 李容文의 명의로 총독부의 발행허가를 얻었는데, 주식을 인수한 78명은 각 도의 유지를 망라하였고, 그 가운데 중심인물은 중앙학교의 교장 金性洙였다. 창간 당시의 사장은 朴泳孝, 편집감독 柳瑾·梁起鐸, 주간 張德秀, 발행인 겸 편집국장은 이상협이었다. 창간사에서 밝힌 주지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의 세 가지였다.

 초기의 편집진은 대부분이 20대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청년 신문’이었다. 사장 박영효와 편집감독 유 근은 같은 나이인 59세였고, 양기탁은 49세였으나 실질적으로 제작을 담당한 기자들은 대부분이 20대였다. 발기인 대표 김성수가 29세였고, 주간 장덕수가 25세, 편집국장 이상협이 27세, 논설위원 겸 정치부장 秦學文이 26세 등이었다. 논설기자도 장덕준(28세)·金明植(29세)이 20대 후반이었다. 평기자 가운데는 김정진(32세) 만이 30을 넘었을 뿐, 金東成(30세)·南相一(24세)·廉想涉(23세)·韓基岳(22세)·柳光烈(21세)·李瑞求(21세)·김형원(20세) 등으로 20대 초반이 많았다. 일제치하 대부분의 기간 동안≪동아일보≫의 경영을 맡게 되는 송진우가 1921년 9월에 사장에 취임했던 때는 32세였다.

 그러나 젊은 청년들이 만드는 신문은 내부의 갈등과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총독부로부터 신문이 빈번한 압수를 당하여 창간된 첫 해에≪조선일보≫와≪동아일보≫가 모두 정간처분을 받았다. 당시의 사회전반에 걸쳐서 청년들의 진보적인 사고는 노년층 또는 儒林과도 대립하는 상황이었다.≪동아일보≫내부에서도 청년층과 노년층의 세대차이에 의한 갈등이 있었다. 초대 사장 박영효는 명의만 빌려준 셈이었고 2개월 동안 재임한 뒤에 물러났다. 박영효가 단명으로 사장직을 내 놓아야했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세대차이가 빚은 갈등도 주된 원인의 하나였다. 29세의 청년 논설기자 김명식이 집필한 연속사설<조선 父老에게 고함>(1920. 5. 4∼9, 6회 연재)과 權悳圭가 기고하여 5월 8·9일 양일간에 걸쳐 게재한<假明人 頭上의 一棒>이 유림의 불만을 사서 불매동맹까지 일어나자 박영효가 이를 감당치 못하겠다 하여 사장직을 내 놓은 것이다.083)金明植,<筆禍와 論戰>(≪三千里≫, 1934년 11월호), 32∼35쪽. 김명식의 사설은 고질적인 낡은 인습을 비판하고 父老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새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젊은 세대가 앞장설 것을 강조한 내용이고, 권덕규는 조선유교의 末流가 慕華 사대사상으로 인해 자주정신을 상실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구세력을 비판하였다.084)≪東亞日報社史≫1(동아일보사, 1975), 134∼138쪽.

 1923년 5월에는 이광수가 촉탁으로 입사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趙東祜가 논설기자로 입사하였고, 1925년 7월에는 朱耀翰이 입사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상해에서≪독립신문≫을 만들던 사람들이다.≪동아일보≫의 주요 제작진 가운데는 당시에, 또는 후에 사회주의자로 활약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장덕수에 이은 제2대 주필 겸 편집국장 洪命憙(1924. 5∼1925. 4), 이광수에 이은 제4대 편집국장 金俊淵(1927. 10∼1928. 5), 영업국장 洪璔植(1921. 9∼1924. 5)을 비롯하여 조동호 등 기자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이 있었으나 1924년과 그 이듬해에 대부분이≪조선일보≫로 옮겨갔다.

 ≪동아일보≫도 처음에는 경영이 어렵기는 했지만 다른 민간지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정된 경영 상태였는데 1921년 9월 주식회사 체제를 갖추면서 宋鎭禹가 사장에 취임했다. 송진우는 1919년 3월, 3·1운동의 지도자 48명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른 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그 기반을 굳힐 무렵에 입사하여 3차례에 걸쳐 사장을 맡으면서 한 생애를≪동아일보≫와 더불어 보내게 되었다.085)정진석, 앞의 책(2001a), 223∼265쪽.
김학준,≪고하 송진우평전≫(동아일보사, 1990).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독립을 향한 집념-고하 송진우전기≫(동아일보사, 1990).
≪동아일보≫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여러 사업을 벌였다. 창간 첫 해 8월에는 미국 국회의원단의 극동시찰을 기회로 장덕준·金東成 두 기자를 북경에 파견하여 국내의 실정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1년 김동성의 국제기자대회 참석, 1922년의 재외동포 위문모금운동(3월 6일부터 약 1년간), 재외교포 위문을 위한 순회강연과 安昌男의 고국방문 비행 주최,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 때의 교포 학살 참상을 취재·보도하는 활동 등을 전개했다. 1924년 4월부터는 중부·서북·삼남의 3개 지방판 분리 편집을 시도하여 지방판 발행을 선도하였다.086)동아일보사,≪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사, 2000).

 ≪동아일보≫는 다양한 문화행사와 스포츠 행사도 주최했다. 창간 첫해에 일본의 성악가 柳兼子 초청 독창회, 일본 유학생 순회강연회 등을 비롯해서 1923년 6월 30일에 처음으로 시작한 전국 여자 정구대회는 국내 최초의 여자 공개 스포츠였으며, 동아수영대회(1929. 9. 1), 동아마라톤대회(1930. 4)도 체육진흥에 이바지했다. 광복 후 1947년 8월에 시작한 전국 중학 지구별 초청 야구대회 주최는 현재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고교야구 쟁패전으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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