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Ⅱ. 언론
  • 4. 1930년대의 언론
  • 3) 문자보급-농촌계몽운동

3) 문자보급-농촌계몽운동

 1930년대의 언론은 논조가 위축되었으나 민족 정신을 고양하는 새로운 사업으로 활로를 모색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언론이 활기를 잃어가던 1920년대 후반부터≪동아일보≫와≪조선일보≫는 조직적인 문자보급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벌여 문맹 타파와 국어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가 일어를 ‘국어’라 하여 한국어 말살 정책을 썼으므로 두 민간지가 이에 대항하여 문자보급운동을 벌인 것이다.

 문자보급운동은 3·1운동 이후 한때 고조되었던 민족운동이 침체되던 시기에 문화운동의 형태로 전개된 민족운동이었다.≪동아일보≫와≪조선일보≫는 전국의 지사·지국을 통한 조직을 활용하고 방학 때에는 귀향하는 남녀 학생을 동원하여 이 운동을 대표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켰던 것이다.

 양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는 국내외적으로 긴장과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1927년에 신간회가 창립되어 민족운동의 단일전선을 지향했으나 괄목할만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는 독일 나치 세력의 약진으로(1930) 세계정세는 전쟁 발발의 긴장이 높아갔다. 미국은 대공황(1929)의 고통을 겪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에 앞서 1927년 3월부터 공황이 몰아쳐서 일본 정부는 4월 25일에 지불유예령(모라토리엄)을 실시하여 조선의 재계에도 심각한 경제적 타격이 불어닥쳤다.096)≪동아일보≫, 1927년 4월 23일,<일본 재계 혼란으로 조선 상계에 대공황>.
≪중외일보≫, 1927년 4월 24일,<재계 혼란과 錢慌>
정진석 편,≪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Ⅰ·Ⅱ(LG상남언론재단, 1998), 435∼436쪽.
제1·2차 조선공산당 사건(1925·1926), 광주학생운동(1929), 그리고 만주사변(1931) 등을 거치는 동안 일제의 탄압은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일제의 가장 심각한 민족말살정책은 한국어에 대한 탄압이었다. 일어를 ‘국어’라 하여 학교교육의 현장에서 일어를 강요하고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였다.≪조선일보≫는 창간 직후인 1920년 5월 1일자에<교육용 일본어에 대하여>라는 논설을 통해서 조선인에게 조선어를 학습시키지 않고 어린아이에게도 일본어를 교육하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정신이 파괴되고 일본의 단점만을 본받게 되는 현실을 통탄하면서 교육용 일본어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가 총독부의 압수처분을 받았다.097)정진석 편, 위의 책, 704∼705쪽.≪동아일보≫와≪조선일보≫가 조직적인 문자 보급운동을 펼친 것은 이같은 시대상황이 배경이었다.

 문자보급운동이 본격화했던 1930년 무렵의 조선인구는 2,000만 명이 약간 넘었는데 이 가운데 1천 700만 명 가량이 문맹이었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지 않은 학령미달 어린이를 약 200만 명으로 잡고, 늙거나 중년 이상 부녀자로서 문자를 깨우치기 불가능한 사람을 100만 명으로 추산하면 1,400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문맹이었다. 이를 통계로 살펴보면<표 1>과 같다.098)안재홍,<1천 4백만 문맹과 대중문화운동>(≪삼천리≫, 1931년 9월호), 3쪽.

조선인구수 20,437,219명
보통학교수 1,710교
보교생도수 487,878명
학령아동수 2,450,000명
100명당취학율 19.9%

<표 1>1930년대의 취학율

 이 표를 보더라도 245만 명의 학령 아동 가운데 20%도 못되는 아이들만 보통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80%가 넘는 어린이들은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서당의 총수는 1만 1,469개소였는데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이 16만 2,247명이었으므로 이를 합쳐보아도 교육을 받는 어린이는 74만 630명에 지나지 않았다.099)위와 같음. 이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통학교를 신설한다 할지라도 매년 늘어나는 학령아동을 모두 수용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학령 아동과 성인을 위해 신문사에서 벌인 문맹퇴치운동은 시급하고 중요한 당면과제였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표 2>와 같다.

연도 참가교 학생수 수강인원 비 고
1929   409명 2,849명 참가학생 409명 중 91명의 보고서만 집계한 수강자임
1930 46교 900명 10,567명 <한글원본>9만 부 배포
1931   1,800명 20,800명 <한글원본>20만 부, 추가 10만 부 배포(계 30만 부)
1934 124교 5,078명   집계된 수강인원 미상
1935       <한글원본>10만 부 배포
1936       <한글원본>50만 부 배포

<표 2>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의 성과

1932·1933년은 문자보급운동 중단.

 ≪동아일보≫는 1928년 4월 1일을 기해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으나 총독부의 방해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1년에서 1934년까지 4차례에 걸쳐 학생 하기 ‘브·나로드(V. Narod)운동’을 전개하여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운동을 벌였다. 브·나로드운동이란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층이 농민 속으로 파고들어 농민들을 상대로 벌인 계몽운동으로 러시아어로 ‘농민 속으로’라는 뜻이다. 브·나로드운동은 한글강습 외에도 위생강연·학술강연 등 광범한 계몽운동이었으나 주축은 역시 문맹타파였다.≪동아일보≫는 제4회가 되는 1934년부터는 브·나로드운동의 명칭을 ‘계몽운동대’로 개칭하였다.≪동아일보≫가 벌인 브·나로드운동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도별 1회(1931) 2회(1932) 3회(1933) 4회(1934) 합 계
운동기간 62일간
(7. 21∼9. 20)
82일간
(7. 11∼9. 30)
81일간
(7. 12∼9. 30)
73일간
(7. 2∼9. 12)
298일
개 강
총일수
2,289일 8,182일 6,304일 3,962일 20,737명
계 몽
대원수
423명 2,724명 1,506명 1,098명 5,751명
강습지 142곳 592곳 315곳 271곳(만주29,
일본7 포함)
1,320곳
수강생
총인원
9,492명 41,153명 27,352명 20,601명 97,598명
교 재
배부수
30만 부 60만 부 60만 부 60만 부 210만 부
금 지 11곳 69곳 67곳 33곳 180곳
중 지 10곳 17곳 26곳 53곳

<표 3>동아일보 브·나로드운동의 성과

 그러나 총독부는 두 신문사의 문자보급운동을 처음부터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동아일보≫의 경우는 1931년 첫 해에 142곳에서 강습회를 열었는데, 그 중 11곳에서 금지당했다.100)≪동아일보≫, 1931년 10월 21일,<금년 하기 이용 제1회 브나로드운동 총결산>. 이듬해 제2회 운동이 시작될 때인 5월 17일에는<학교와 학생에 고함>이라는 사설을 실었으나 총독부는 이 사설의 후반부 일부를 삭제하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집회허가를 제때에 내주지 않거나 이를 금지 또는 중지시키는 경우도 있었다.101)≪동아일보≫, 1932년 10월 6일, 사설<제2회 브나로드운동의 성과>.

 마침내 1935년 여름방학부터는≪동아일보≫·≪조선일보≫양 신문사가 문자보급운동을 동시에 중단하였다. 이때부터 총독부의 압력으로 학생을 동원하는 계몽운동은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조선일보≫는 1935년 12월에 교재 10만 부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고, 1936년 12월에는 50만 부를 배포하였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계몽운동을 벌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교재를 배포하고 겨울방학에 귀향하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이 운동을 계속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운동이 시작되던 때에는 일제의 언론 탄압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던 시기였다. 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는 좌절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두 신문사는 문자보급운동이라는 민족적 대사업을 기획하여 해마다 신문의 발행부수보다 훨씬 많은 문자보급 교재를 만들어 무료로 전국에 배포하고 한글을 깨우치도록 했다는 사실은 세계 언론사에서도 희귀한 일이다.

 신문사의 문자보급, 농촌계몽 그리고 민족정신 함양의 노력을 반영한 문학작품들이 신문에 많이 실리게 되었다. 이광수의≪이순신≫(1931. 6.∼1932. 4.)은 민족정신을 고양한 작품으로≪동아일보≫의 현충사 중건에 맞추어 연재되었다. 심훈의≪상록수≫(1935. 9. 10.∼1935. 2. 15. 연재)는 동아일보사가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공모한 가운데 당선된 장편소설인데 문자보급운동이 소재가 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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