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Ⅲ. 국학 연구
  • 3. 국사학
  • 1) 민족주의사학

1) 민족주의사학

 민족주의사학은 정신을 크게 강조하고 있었다. 이미 국권을 상실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민족주의사학자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족정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185)민족주의사학에 관해서는 주 1)을 제외하고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것.
李萬烈,≪韓國近代 歷史學의 理解≫(文學과知性社, 1981).
韓永愚,≪韓國民族主義歷史學≫(一潮閣, 1994).
특히 박은식의 경우에 그 점이 잘 드러나는데, 그는 이미 한말≪皇城新聞≫을 통해서도 ‘國魂’의 중요성을 내세운 바 있었다.186)≪皇城新聞≫, 1908년 3월 20일, 논설<朝鮮魂이 稍稍還乎>. 그는 1915년 저술한≪韓國痛史≫의 緖言에서 역사저술의 목적이 민족정신 곧 ‘神’을 보존함에 있다고 밝혔던 것이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는 滅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대개 나라는 形이고 역사는 神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形은 허물어졌으나 神만이 獨存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痛史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神이 보존되어 멸하지 않으면, 形이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朴殷植,<韓國痛史>,≪朴殷植全書≫上,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75, 24쪽)

 그리고 그는≪한국통사≫의 결론에서 國敎·國學·국어·국문·국사 등을 魂으로, 錢穀·卒乘·城池·船艦·器械 등을 魄이라 하고, 魂이 살아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187)朴殷植,≪朴殷植全書≫上, 376쪽. 즉 박은식은 정신, 또는 혼을 역사로 이해하였고, 역사가 존재하면 國魂이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한 셈이었다. 그가≪한국통사≫와≪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였다.

 이처럼 정신을 강조한 사관은 박은식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얼’을 내세운 정인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東亞日報≫에 연재한<五千年間 朝鮮의 얼>에서 정인보는 역사의 근본을 얼에서 구하였는데, 사실의 규명보다도 민족의 정신적인 각성을 강조하고 있었다.188)李基白, 앞의 글, 163∼164쪽.

 신채호는 박은식의 혼이나 정인보의 얼보다는 구체적인 郎家思想을 중시하였다. 그는≪朝鮮史硏究艸≫의<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라는 논문에서 花郞徒의 사상을 낭가사상이라고 하였고, 그것을 한국의 고유사상으로 보았다. 그 고유한 낭가사상이 바로 민족정신의 구현이고 독립사상의 원천이라고 지적한 신채호는 사대적인 유교사상을 외래사상으로 보고, 한국민족사를 고유사상과 외래사상의 투쟁사로 파악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朝鮮上古史≫總論)이라고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이민족과의 투쟁사를 포함하지만 사상적인 투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189)李基白, 위의 글, 165∼166쪽. 문일평 또한<崔瑩과 朝鮮精神>이라는 글에서,190)≪朝鮮日報≫, 1929년 6월 29일∼7월 11일. 한국사의 전개를 大朝鮮精神과 小朝鮮精神의 대립과 갈등으로 설명한 바 있었다. 그는 그것을 自尊思想과 漢化思想, 또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로도 표현하였는데 사상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같은 문일평의 ‘조선정신’은 신채호가 제시한 낭가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 문일평은 구체적인 표현은 없지만 ‘朝鮮心’이라는 용어와 함께≪訓民正音≫으로 대표되는 ‘조선사상’을 논의하기도 하였다.191)文一平,<史眼으로 본 朝鮮>(≪湖岩全集≫2,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 15쪽.

 이처럼 민족주의사학에서는 한국사를 움직이는 축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고 있었다. 사학자에 따라서 표현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정신적이고 관념적이었다. 민족주의사학자들은 민족과 개인을 단일체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사회나 계급과 같은 부분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신채호가≪讀史新論≫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성쇠의 상태를 閱敍할 者”라고 언명한 것처럼,192)申采浩,<讀史新論>(≪改訂版 丹齋申采浩全集≫上, 螢雪出版社, 1977), 471쪽. 역사를 민족정신의 기운에 따른 盛衰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타파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민족정신의 고양을 역사서술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國魂 중심의 민족주의 의식에서 출발한 박은식의 역사학은 ‘舊本新參’을 내세우고, ‘近世新史’의 체제를 따라 역사를 서술한다고 하여 한말 사학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한국통사≫와≪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보인 시대구분과 같은 것으로 그렇게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영웅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독립운동의 영웅이지만≪安重根傳≫이나≪李儁傳≫등을 1910년대에 저술하였다.≪李舜臣傳≫의 저술 역시 그러한 면에서 이해된다. 물론 3·1운동사라고 할 수 있는≪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며, 민중이 역사의 주역이라는 인식으로 변화하는 점도 확인된다. 따라서 박은식의 역사학은 계몽주의 역사학의 단계에서 근대 민족주의사학으로 넘어가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193)박은식의 역사학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愼鏞廈,<朴殷植의 歷史觀>(≪歷史學報≫90·91, 1981).
尹炳喜,<白巖 朴殷植의 歷史意識>(≪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下, 探求堂, 1992).

 민족주의사학은 신채호에서 성립되었다고 이야기된다.194)신채호의 역사학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申一澈,≪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高麗大學校出版部, 1981).
李萬烈,≪丹齋 申采浩의 歷史學 硏究≫(文學과知性社, 1990).
그는 한말에<歷史와 愛國心의 關係>라는 글을 쓴 바 있는데,195)申采浩,<歷史와 愛國心의 關係>(≪大韓協會會報≫3, 1908). 역사를 애국심의 원천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채호가 관심을 집중한 분야는 한국고대사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는≪독사신론≫·≪조선상고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가 모두 고대사에 관한 것이었다. 夫餘-高句麗 중심의 전승체계와 前後三韓說을 근간으로 하여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체계화한 신채호는,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조선상고사≫<總論>첫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心的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이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我’라 하며, 무엇을 ‘非我’라 하느뇨. 깊이 팔 것도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我’라 하고, 그 외에는 ‘非我’라 하나니…(申采浩,<朝鮮上古史>, ≪改訂版 丹齋申采浩全集≫上, 31쪽).

 신채호는 사실의 고증을 역사학의 임무로 생각하고, 類證·互證·追證·反證·辨證 등의 방법과 언어학적 방법 등을 통하여 수준높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것은 이념을 앞세운 민족주의사학이 빠지기 쉬운 교조적인 역사서술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역사에 주체에 관해서도 신채호는 민중을 상정하였다. 그 역시 영웅을 중시하였으나,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몇몇의 영웅이 아니라,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新國民’을 제기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신채호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음은 그가 집필한<朝鮮革命宣言>(1923)을 통해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그는 또한 역사연구에서 正統論이나 大義名分論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신채호의 연구가 민족주의사학을 근대 역사학으로 자리잡게 하였던 것이다.196)이상의 내용은 李萬烈, 앞의 책이 상세하다.

 박은식과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된 역사적 관심도 민족의 祖先이 되는 단군을 비롯하여, 한국민족이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고 생각되는 부여-고구려-渤海와 연계된 만주지역이었다. 만주를 기반으로 삼아 국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 가운데에는 직접·간접으로 大倧敎와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물론 박은식은 그러한 관심과 더불어 빼앗긴 국권의 회복을 기대하며 근대사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고, 문일평은 근대문화의 수용과 관련하여 근대사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는 여러 가지 여건에서 정치한 고증이 뒤따르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만주뿐 아니라 중국 북부까지도 한민족이 지배하였다는 國粹的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1934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朝鮮學運動을 주도하고 있었다. 안재홍·정인보·문일평 등이 깊이 관여한 조선학운동은 1934년 9월 茶山 逝去 99 주년기념사업을 계기로 비롯되었는데, 특히 新朝鮮社가 丁若鏞의 전집인≪與猶堂全書≫의 간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안재홍과 정인보가≪여유당전서≫의 교열을 맡았던 것이다. 정인보·안재홍·문일평·玄相允을 연사로 한 기념강연회도 개최되었다. 정인보는<茶山先生과 朝鮮學>이라는 강연을 통하여, 다산에 관한 연구를 조선학과 결부시켜 이해하였다. 안재홍은 조선학의 개념을 막연하게나마 정리하였고, 단군조선과 실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하여 사회경제사학자들의 비판이 뒤따랐는데, 그들은 진정한 조선학의 수립은 유물사관에 기초한 과학적 방법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정치적 약진이 불리한 시기에 ‘最善한 차선책’으로서의 문화운동으로 조선학운동을 인식하였고, 개량적이지만 현실적인 운동으로 모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학운동은 조선의 후진적 특수성을 세계속의 조선을 알기 위한 조선 고유의 ‘문화특수성향’의 탐구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종래의 문헌학적·해석학적 방법론을 탈피하지는 못하였다.197)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韓永愚,<韓國學의 槪念과 分野>(≪한국학연구≫1, 단국대한국학연구소, 1994).
이만열,<국학의 성립 발전과 그 과제>(≪東方學志≫100, 1998).
임형택,<국학의 성립과정과 실학에 대한 인식>(≪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
全胤善,<1930年代 ‘朝鮮學’ 振興運動 硏究>(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98).

 민족주의사학은 일제 강점하에서 식민주의사학에 대항하고 있었다. 민족과 개인을 한 단위로 이해하고,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불철저하였으며, 국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 한국사의 원동력을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것에서 찾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민족주의사학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사회과학적 지식과 실증주의적 연구방법을 적절히 수용하면서 구체성과 객관성을 지닌 역사인식으로 세련되어 가기도 하였다.198)鄭在貞, 앞의 글, 61쪽. 1940년 전후 실증사학에 경도되어 있던 孫晉泰나 李仁榮 등이 신민족주의사학을 논의하게 되는 것도 그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199)신민족주의사학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李基白,<新民族主義史觀論>·<新民族主義史觀과 植民主義史觀>(≪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 1978).
金貞培,<新民族主義史觀>(≪韓國古代史論의 新潮流≫, 高麗大 出版部, 1980).
李基白,<孫晉泰의 學問과 業績>·<韓國史硏究의 方法論的 反省>(≪韓國史像의 再構成≫, 一潮閣, 1991).
이필영,<남창 손진태의 역사민속학의 성격>(≪韓國學報≫41, 1985).
韓永愚,<孫晉泰의 新民族主義史觀>(≪韓國民族主義歷史學≫, 一潮閣, 1994).
김수태,<손진태의 식민주의사관 비판>(≪吉玄益敎授停年紀念 史學論叢≫, 간행위원회, 1996).
남근우,<손진태의 민족문화론과 만선사학>(≪역사와 현실≫28,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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